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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투칼럼] 성급한 나를 구속한 선입견…가나서 만난 '어른'이 깼다

연합뉴스

입력 2025.10.23 07:00

수정 2025.10.23 07:00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우분투칼럼] 성급한 나를 구속한 선입견…가나서 만난 '어른'이 깼다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출처=연합뉴스)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출처=연합뉴스)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아프리카 가나 지도 (출처=연합뉴스)
아프리카 가나 지도 (출처=연합뉴스)


세계 장기 집권 독재자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고질적인 문제의 연원은 과거 식민 지배 시절에서 일정 부분 찾을 수 있다. 당초 식민통치국들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베를린회의 결과에 따라 인위적인 직선으로 국경을 그었다.

식민지배국은 통치 기간 일부 부족에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고 중간 관리자로 활용했다. 서로 다른 부족들은 새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국경에 묶여 하나의 국가로 강제 통합됐다. 국가 정체성이 자리 잡기도 전에 2차 대전 후 식민통치국의 지배자들이 황급히 떠났고, 아프리카는 너도나도 독립을 선언했다.

'분할지배정책'(Divide and Rule)은 한 집단을 여러 집단으로 나눠 각 집단을 서로 대립시키고, 이를 통해 지배자가 손쉽게 통치하는 전략이다. 식민지 시절부터 싹튼 부족 간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혼란 속에서 무력을 가진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이후 대내외의 민주화 압박 속에서 형식적인 선거가 도입됐다. 그 결과 군부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들은 권력의 맛에 취해 영구 독재를 시도했다. 이런 서사 속에서 30년 넘게 집권한 독재자들이 다수 등장했다.

독재자 한 명의 장기 집권이 아니더라도 형식적인 다당제, 실질적 일당제 구조 속에서 같은 정당이 30년 이상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투표조작이나 불공정 선거를 불사하면서 대통령을 배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나는 예외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독립 초기 군사 쿠데타 등 다른 나라들과 같은 혼란을 겪었지만 국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또 여야 정권 교체가 꾸준히 이어졌다. 심지어 후보 간 표 차이가 0.46%P에 불과한 조작 의심 상황에서도 패배한 후보가 깨끗이 결과에 승복하며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했다. 가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본인의 집권 기간 안에 가족과 부족의 부를 축적하려는 권력자들의 사익 추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이들에게 고위 공직이나 이권 사업을 나눠주는 부작용도 있다.

생전의 존 아타밀스 전 가나 대통령 (출처=연합뉴스)
생전의 존 아타밀스 전 가나 대통령 (출처=연합뉴스)

2022년 2월 처음 가나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필자가 사는 칸톤먼츠 지역은 낮에 걸어 다녀도 안전했고 경찰이 이유 없이 검문하는 일도 드물었다. 늦은 시간까지 트로트로(미니밴처럼 생긴 대중교통 수단)를 이용하는 현지인들은 큰 불안감이 없었다. 공항 입국 시 외국인 짐 검사는 까다로웠지만 끝까지 버티면 뒷돈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치안이 작동하는 나라는 찾기 어려웠다. 부르키나파소, 나이지리아와 달리 가나는 서아프리카에서 주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1년쯤 지나자 실망이 이어졌다.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들의 부정 축재가 만연했고 의사와 같은 전문직조차 전문성보다 정치권 진출을 꿈꾸는 분위기였다. 업무상 중요하거나 긴급한 연락은 공식 채널이 아닌 비선 채널을 통해야만 이뤄졌다.

정부 권력을 가진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리베이트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명품으로 치장한 부자들과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는 시민들, 신호 대기 중인 차량 사이로 동전을 구걸하는 아이들 사이의 극심한 빈부격차가 일상이었다. 이러한 불평등이 당연하게 여겨져 '이 안에서 내가 깨끗하게 공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또 사익을 노린 접근이 늘어나면서 현지인들과 접점을 피하게 됐다. 점점 방어적으로 변해갔다.

국가 정책을 이끄는 소수 엘리트가 대부분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시민들도 이에 무감각한 현실을 보면서 '이 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어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많은 현지인이 존 아타밀스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것을 새로 알게 됐다. 군부 출신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을 지내고 이후 대통령이 된 그는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의 이웃은 옆집이 부통령 집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경찰과 군인이 방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고 한다. 앞서 가나에 오기 전 책 '있는 그대로 가나'를 읽은 적이 있다. 책 내용 중에 선거 조작 의혹과 더불어 대선에서 경쟁 후보를 근소한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부분이 있어, 그를 '권력에 눈먼 엘리트' 정도로 지레 짐작했던 필자의 선입견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가나의 존경받는 '어른' 크와미 피아님 (출처=연합뉴스)
가나의 존경받는 '어른' 크와미 피아님 (출처=연합뉴스)

또 뜻밖의 기회로 진정한 '어른' 크와미 피아님(Kwame Pianim)을 만나게 됐다. 2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는 가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걸고 나라의 변화를 믿는 분이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긴 투옥 생활을 견뎌온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총기가 청년 같았다. 만연한 부정부패를 개탄하며 현 정권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가 현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대부분의 현지인은 알고 있었다. 그의 발언은 언론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다. 이러한 사실은 가나의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다만 그가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자 문지방이 닳게 드나들던 정치인들이 이제 대부분 거리를 두고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대의에 바치고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청렴하게 살아왔다. 그런 어른을 알게 된 것이 기뻤다. 그의 행적은 우리나라의 '멸사봉공'을 실천한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어른들이 있었기에 그 후손인 필자가 자유 대한민국에서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가나에 대해 회의감이 들던 시절, 그를 만난 그날은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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