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연작소설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출간
"SF,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 장르…우리 존재 선명하게 보여줘"
천선란 "좀비 향한 '덕심' 제대로 소설로 써보고 싶었죠"좀비 연작소설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출간
"SF,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 장르…우리 존재 선명하게 보여줘"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이번 소설집은 좀비물을 좋아하는 '덕심'으로 썼어요. 어렸을 때 언니와 거실에 이불을 깔아놓고 좀비 영화를 보는 게 취미였어요. 너무 좋아해서 '좀비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웠을 정도죠."
주목받는 젊은 SF(과학소설) 작가 천선란(32)이 세 편의 좀비 연작 중편을 담은 소설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허블)를 펴냈다.
수록작들은 6년에 걸쳐 완성됐다. 앞서 발표한 단편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2019)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2020)를 각각 개정해 중편으로 확장하고, 두 작품과 세계관이 이어지는 새로운 중편 '우리를 아십니까'와 엮었다.
지난 22일 서울 중구 남산책방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천선란은 집필 계기와 배경을 설명하며 연신 '덕심'이라는 표현을 썼다. 특정 분야에 심취한 마니아를 뜻하는 '덕후'와 마음 심(心)을 더한 말로, 좀비물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제가 좋아하는 좀비를 제 언어로 제대로 써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좀비 소재 작품은 흔하지만, 이런 내용은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설명처럼 소설집은 일반적인 좀비물과 결이 다르다. 대부분의 좀비물이 세계의 멸망 과정과 그 속에서 주인공의 생존 투쟁을 다룬다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수록작들은 근미래 이미 좀비로 멸망한 세계에서 평범한 이들이 서로 연대하는 과정을 그렸다.
작품 속 인물들은 좀비가 되고도 마치 기억이 남아있는 듯 사랑하던 사람을 공격하지 않거나, 아예 또렷한 의식을 갖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한다. 이들이 왜 다른 좀비들과 다른지 명확한 이유는 작품에 제시되지 않는다.
작가는 "좀비물은 기원, 특징 등 세부적인 면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장르인데, 제가 생각한 좀비 사태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재난 상황'이라는 것"이라고 꼽았다.
이어 "다른 장르에선 오직 생존만 생각하지만, 좀비물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지독하다고 생각했다"며 "그런 상황과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소설집 속 좀비들에게 마치 인간성이 남아있는 것처럼 묘사해 인간성에 관한 고민을 담았다. 독자는 이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작가는 "점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규정할 수 없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과거에는 신체적인 외형, 이족보행, 도구 사용 이런 것을 인간의 특성으로 정의해왔다면 앞으로는 그런 정의가 차근차근 사라질 것 같다"고 했다.
천선란은 장편 SF '천 개의 파랑'으로 미국 워너브라더스 픽처스(Warner Bros. Pictures)와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다. 판권 계약 액수는 6억∼7억원가량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이 같은 경사에도 크게 기뻐하지 못했다고 한다. 계약 체결이 확정된 시기가 비상계엄 여파로 인한 대통령 탄핵 정국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대형 산불로 국내외 분위기가 침통했던 올해 초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수시로 속보가 들려오는 와중에 판권 계약이 이뤄져서 '다양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구나' 싶고 복잡한 기분이었다"면서 "판권 계약이 이뤄져도 중간에 무산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2019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천선란은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천 개의 파랑' 외에도 장편 '나인', 단편소설집 '노랜드', 연작소설집 '이끼숲' 등 여러 책을 펴냈다. 착실하게 작품을 발표하며 신인을 벗어나 한국 SF를 대표하는 주자로 떠올랐다.
작가는 "데뷔하고 한동안 작가라는 이름의 무게감 때문에 어려워했던 것 같다"며 "작가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어렵게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에만 집중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셜록 홈스나 해리 포터처럼 사랑받는 시리즈, 사랑받는 캐릭터를 만드는 게 저의 꿈"이라고 답했다. 어떤 장르에서 그런 시리즈를 만들고 싶은지 묻자 천선란은 망설임 없이 "SF"라고 말했다.
"SF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우주에서 낯선 존재나 낯선 사회와 조우했을 때 우리 존재가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 저는 그 감각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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