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유산 보존과학 분야 개척한 '1세대' 이오희 명예회장
1976년 낡은 책상서 시작…일본서 가져온 샘플로 녹 없애기도
보존과학센터 개관 특별전…故 이상수 선생 생전 모습 AI 복원
"이쑤시개 하나 들고 시작한 문화유산 보존과학…이젠 세계 1등"한국 문화유산 보존과학 분야 개척한 '1세대' 이오희 명예회장
1976년 낡은 책상서 시작…일본서 가져온 샘플로 녹 없애기도
보존과학센터 개관 특별전…故 이상수 선생 생전 모습 AI 복원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97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즉 경복궁 인근에 있던 시절이다.
대만과 일본에서 연수를 마치고 막 돌아온 젊은 직원 2명이 작전에 나섰다. 당시 박물관 고고부 자료정리실로 쓰려던 빈방을 '점거'한 것이다.
미술부와 유물관리부 소속이었던 두 사람은 "앞으로 이 방은 보존과학실입니다"라고 말한 뒤, 말 그대로 눌러앉았다. 박물관 어른 혹은 선배들에게 혼난 건 당연하다.
낡은 책상에 도구도 변변찮았던 때. 이들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코팅제와 부식억제제 샘플, 그리고 이쑤시개로 작업을 시작했다.
부서진 금동 불상의 조각을 붙이고, 토기 조각을 잇고….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인 이오희(77) 한국문화유산보존과학회 명예회장은 "예전에는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보존 과학 수준이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가 개관한 지난 28일 만난 이 명예회장은 1층 전시 공간에 들어선 '보존과학자의 방'을 둘러보며 "후배들에게 참 고맙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1세대 문화유산 보존과학자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던 그는 1975년 일본 도쿄(東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과학 연수를 마친 뒤, 주로 금속 문화유산을 다뤄왔다.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된 국보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그가 작업한 대표적인 유물이다.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 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X-선으로 촬영해 상감 기법을 발견한 건 한국 문화유산 보존과학사에 큰 성과로 꼽힌다.
상감은 금속, 자기 등으로 만든 기물에 홈을 파거나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 금, 은, 자개 등 다른 재질을 넣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을 뜻한다.
이 명예회장과 함께 수많은 문화유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되살린 이가 '점거 동지' 고(故) 이상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이다.
이 명예회장이 일본에서 보존 처리 기술을 배우고 익힐 때, 이 전 실장은 대만 고궁박물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보존과학으로 인연을 맺은 끈끈한 사이다.
이 명예회장은 "과거 문화유산 보존 분야에서 금속은 이오희, 도자는 이상수, 목제는 최광남(전 문화재관리국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장)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쑤시개 하나 들고 녹 제거하고, 이물질 떼어내고 그렇게 했죠. 유물에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조심했는데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을까 싶어요. (웃음)"
옛 직장을 돌아보던 원로 보존과학자는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보존과학자의 방'이라고 이름 붙은 공간에는 손때 묻은 기기와 낡은 책상을 뒀다.
이 명예회장은 전시장을 소개하던 곽홍인 학예연구관을 향해 "옛날 선배들 물건이어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리 잘 보관했냐"며 고마워했다.
그는 유물을 보관하던 상자, 유물 카드를 찬찬히 짚어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1998년 작고한 이상수 전 실장의 생전 모습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한 영상이 나오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 쳐다봤다.
이 명예회장은 우리 문화유산 보존과학 분야가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물관 여성 1호' 기록을 세운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덕분이라며 공을 넘겼다.
그는 지난해 별세한 이 전 관장을 떠올리며 "지금과 달리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관장님께서 여러 차례 부탁하시고 연수 기회를 마련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한 보존과학 분야가 자체 건물까지 갖게 된 지금의 상황을 그는 어떻게 볼까.
이 명예회장은 "우리의 문화 수준과 역량이 그만큼 성장한 것"이라며 "50년 전 내가 공부했던 일본 도쿄도 보존과학센터가 없다"고 말했다.
"조만간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열리는 국제 심포지엄에 갑니다. 오늘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보존과학센터를 자랑해야겠습니다."
박물관은 센터 개관을 기념해 박물관 보존과학 50년 여정을 돌아보는 '보존과학, 새로운 시작 함께하는 미래' 전시를 내년 6월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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