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국내 철강산업이 내수 부진과 함께 저가 철강재 유입, 미국의 50% 철강관세 부과로 수출이 급감하며 '삼중고'를 겪고 있는데, 이에 더해 '사중고'를 짊어지게 됐다며 한탄했다. 지난해 국내 최대 철강업체인 포스코의 영업이익이 1조7000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3분의 1가량이 사라지는 셈이다.
정부가 곧 확정할 제4차 탄소배출권거래제(2026~2030년)에 따라 유상할당 비율을 높이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제조업체의 부담이 막대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탄소감축은 전 세계적 흐름이자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정부는 이번 4차 계획을 통해 산업계에 '탄소비용 부담'을 강화해 감축 압력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이는 단순한 규제가 아닌 '생산비용 상승'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탄소배출권의 유상할당 비율이 높아지면 기업들은 배출권을 사기 위해 현금을 더 지출해야 한다. 특히 해외 기업과 경쟁이 치열한 제조업의 경우 이 같은 비용 상승은 곧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이미 이중 부담에 직면해 있다. 국내에서는 배출권 비용을 내고, 수출할 때도 EU의 탄소규제에 대응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감축 목표만 앞세운다면, 국내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제조업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산업계의 부담을 이유로 감축 속도를 무작정 늦출 수는 없다. 다만 각 업종의 기술 수준과 전환 여건을 고려한 '현실적 감축 로드맵'이 마련돼야 한다. 기술개발과 공정전환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막대한 투자도 있어야 한다. 탄소저감 기술을 개발하거나 친환경 공정으로 전환한 기업에는 세제 혜택이나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배출권거래제 수익의 일부를 산업전환 지원기금으로 환원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이런 지원이 병행될 때, 감축정책은 '규제'가 아닌 '혁신'의 촉매가 될 수 있다.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업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급구조, 인프라, 제도적 환경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산업 육성, 이산화탄소 포집·저장(CCUS) 기술 상용화와 같은 국가 차원의 전략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근본적인 감축이 어렵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지속가능 여부'이다. 단기간의 수치 경쟁보다는 산업이 살아남아 감축을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탄소감축이 경제 쇠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탄소를 감축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기후위기는 분명 인류가 직면한 위기이지만, 산업 붕괴 역시 국가의 위기다. 환경과 산업은 대립이 아닌 조화 속에서 함께 지켜져야 한다. 정부가 제4차 배출권거래제 최종안을 확정하기에 앞서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결국 탄소감축 정책의 성공은 목표의 크기가 아닌, 그 목표를 현실로 만드는 방법에 달린 것이다.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2035 NDC) 정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공청회가 다음 달 6일 열린다. 11월 셋째 주에는 국제사회에 2035 NDC를 제출해야 하는 일정을 고려하면 사실상 국민의 의견을 듣는 마지막 자리다. 부디 '하향식 목표 설정'이 아닌 공청회의 취지에 맞는 폭넓은 의견 수렴이 되길 기대한다.
padet80@fnnews.com 박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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