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료선언에 'WTO 존중' 문구, 경주선언은 "각료회의 성과 평가"…美반대로 '절충'
'자유무역 상징' WTO 정상선언 빠진건 이례적…정상선언 도출 자체가 성과 평가도
[경주APEC] 돌아온 트럼프 입김에…'자유무역' 경주선언 대신 각료선언에각료선언에 'WTO 존중' 문구, 경주선언은 "각료회의 성과 평가"…美반대로 '절충'
'자유무역 상징' WTO 정상선언 빠진건 이례적…정상선언 도출 자체가 성과 평가도
(경주=연합뉴스) 특별취재단 =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 대표들이 의기투합한 끝에 1일 내놓은 정상 합의문인 '경주선언'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입김으로 다자무역 질서가 약해진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트럼프 정부가 밀어붙이는 보호무역 기조에 따라 경주선언에선 다자무역을 상징하는 세계무역기구(WTO) 문구가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칫 경주선언 채택이 불발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딛고 모든 회원이 동의하는 결과물을 도출했고, 경주선언에 'WTO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각료선언을 높이 평가하는 대목을 반영해 APEC이 지향하는 자유무역 정신의 '마지노선'은 지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 트럼프 복귀와 함께 경주선언에서 WTO 문구 빠져
APEC 21개 회원이 이날 채택한 경주선언에는 그간 정상선언문에 통상 담겼던 WTO와 다자주의 지지를 확인하는 직접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역대 APEC 정상선언은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바탕에 깔고 WTO 체제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언급하는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지향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유무역 쇠퇴 기조를 반영한 결과물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조 바이든 전임 미국 행정부가 집권했던 2021∼2024년 APEC 정상선언문에도 모두 'WTO가 그 핵심을 이루는(WTO at its core)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체제'를 지지한다는 표현이 있었다.
APEC 정상회의가 미국 대통령의 본행사 불참 등으로 파행을 겪었던 2017∼2021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종료 이후부터 이 표현이 APEC 선언에 들어갔는데 트럼프 복귀와 함께 다시 사라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무역시스템의 법적 토대를 제공해온 WTO 체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고, 이번에 WTO 요소를 경주선언에 포함하는 방안에 끝까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선언은 대신 "견고한 무역 및 투자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공동 인식을 재확인"한다며 경제협력 심화에 의견을 같이했다.
◇ 각료선언엔 'WTO 존중' 문구…경주선언은 "각료회의 성과 평가" 절충
경주선언에서 사라진 WTO 문안은 장관급인 외교통상합동각료회의(AMM) 공동선언문엔 포함됐다.
21개 회원 외교·통상 장관들은 이날 공동성명에서 "무역 현안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WTO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며 "우리는 WTO에서 합의된 규범이 글로벌 무역 촉진의 핵심임을 인식한다"고 밝혔다.
경주선언은 "외교통상합동각료회의의 성과를 향후 협력을 위한 중요한 기반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는데, 각료선언에 담긴 WTO 문안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문안 조율 과정에서 미국은 WTO 표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반면 다수 회원은 이에 난색을 보이며 맞섰는데, 공동성명을 채택해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나름대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해석된다.
외교 소식통은 "정상 선언문과 각료선언문을 거의 하나의 패키지처럼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외교 소식통도 "폭넓은 무역투자협력의 정신을 경주선언에 담고 WTO 등 구체 내용은 AMM 성명에 담는 것으로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AMM 성명에 담긴 WTO 표현 수준 자체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과 비교하면 다소 후퇴했다.
"WTO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AMM 성명은 지난해까지의 "WTO가 그 핵심을 이루는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체제를 지지한다"는 표현에서 약화했다.
최근 AMM 공동성명에 줄곧 반영돼왔던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 관련 표현도 이번 성명에선 빠졌다.
2021∼2024년 공동성명엔 "자유롭고, 개방되고, 공정하고, 비차별적이고, 투명하고, 포용적이고, 예측가능한 무역과 투자 환경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올해 성명에선 해당 표현이 사라졌다. 대신 말미에 "다자주의 정신 아래 APEC의 지속적인 협력을 중시한다"는 표현만 있다.
◇ 미중 대립 속 정상선언 도출 자체가 성과 평가도
경주선언에는 자유무역 정신을 나타내는 표현은 그래도 대체로 유지됐다.
회원들이 "우리는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의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 시장 주도적인 방식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통합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전한 부분이다.
당초 외교가에선 자유무역에 반해 무역장벽을 세우고 관세를 '무기화'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다시 들어서면서 관련 문구가 예년 수준으로 반영되기 쉽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번 APEC 정상선언과 각료선언은 문구 협의 과정에서 자칫 채택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올만큼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1기 당시 전례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2018년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당시 미중의 대립으로 1993년 첫 회의 이래 처음으로 공동성명이 나오지 못했다.
특히 미중이 서로 강경한 입장을 내세운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동의 문안을 도출한 데 성공한 것은 그 자체로 성과로 평가된다.
미중 등 회원은 의견 대립이 팽팽했지만 그럼에도 공동성명을 타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다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날 경주선언은 "우리는 다중 이해관계자 참여 강화가 APEC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서 아이디어 육성의 장으로서의 APEC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함을 인정한다"고 강조했다.
(김동규 김지연 김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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