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검찰·법원

"허위조직도 내밀며 내란 강압수사"…서울대생은 그렇게 간첩이 됐다

뉴스1

입력 2025.11.05 06:00

수정 2025.11.05 09:06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통보한 진실규명 결정 중 1983년 2월쯤 치안본부(경찰)이 작성한 '무장봉기구상안'.(정진태 씨 제공)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통보한 진실규명 결정 중 1983년 2월쯤 치안본부(경찰)이 작성한 '무장봉기구상안'.(정진태 씨 제공)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통보한 진실규명 결정 중 정진태 씨가 체포된 뒤 20일 넘게 지나서야 발부된 구속영장.(정진태 씨 제공)
지난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통보한 진실규명 결정 중 정진태 씨가 체포된 뒤 20일 넘게 지나서야 발부된 구속영장.(정진태 씨 제공)


(서울=뉴스1) 김종훈 기자
"간첩 잡으면 그리는 도표에 조직책, 자금책, 언론 담당 이렇게 있었고 그 맨 위에 제 이름이 있었죠."

1980년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사회과학 서적을 소지하다 국가보안법 혐의로 징역을 받았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정진태 씨(72)는 당시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수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경찰은 영장도 없이 정 씨를 체포하고 압수수색 한 것은 물론, 그를 주범으로 한 무장봉기 조직도까지 들이밀며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것으로 파악됐다. 또 검찰은 기소하는 과정에서 서적을 소지한 사실만으로 정 씨가 정부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봤다.

5일 뉴스1이 확보한 당시 검찰 공소장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 통지문에 따르면, 내무부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정 씨 고향과 거주지를 탐문·잠복수사 하다 1983년 2월 15일 그를 체포했다.

이후 경찰관은 그를 서울 관악경찰서로 연행해 조사했고, 총 12회에 걸쳐 자술서와 진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건 체포 뒤 20일이 넘게 지난 3월 9일이었다.

영장이 발부되는 사이 정 씨에 대한 수사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기존에 조사를 담당하던 정보과가 손을 떼고 간첩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대공과가 사건을 넘겨받았다.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북한 관련 수사를 전담한 대공과는 그에게 '무장봉기구상안'까지 들이밀었다.

구상안은 범죄조직도처럼 각 피의자의 이름 옆에 직책 등이 적혀있었다. 정 씨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국가전복을 위해 폭력시위를 벌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란음모 혐의 입증은 쉽지 않았고, 치안본부는 '구상안이 작성되고 실행은 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압수수색 과정에서 입수한 사회과학 서적을 소지한 혐의만 적용했다.

이후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원(현 서울남부지검)도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1983년 4월 11일 정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공소장을 보면 검찰은 네 가지 피의사실을 적시했다.

정 씨가 1982년 11월 경기 광명시 소재 지인의 집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5권을 받은 뒤 2질(帙)로 복사해 그중 1질을 보관하며 탐독했고, 이듬해 2월 '공산주의의 미래청사진'을 구입해 보관·탐독했다는 혐의다. 또 '종속이론과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과학', '막스주의 철학' 등을 읽은 혐의도 적용됐다.

문제는 당시 검찰이 자의적 해석으로 정 씨가 이 책을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읽었다고 본 점이다. 검찰은 공소장에 "정 씨가 (당시 사회의) 모순점 등은 민중운동이나 개혁운동에 의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며 "필연적으로는 학생, 노동자, 농민, 서민대중들이 주체세력이 된 민중 봉기를 유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적었다.

또 "노동투쟁을 시작으로 하여 현 정권(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요구함으로써 민중투쟁을 유도하려 했다"는 의심도 공소장에 담겼다.

검찰은 공소장 말미에 "(정 씨가) 정부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고 확신했다"며 "반국가단체인 북한괴리(뢰) 집단의 선정(전)책에 동조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책을 소지했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공소사실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인정되려면 그 내용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어야 하고 피고인에게 이적단체와의 실질적 연관성 등이 있어야 하는데,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심 재판부는 △해당 서적이 현재 국내에서 공식 출판되고 널리 연구되고 있는 점 △서적의 내용이 북한 활동에 동조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 △사상의 학문의 자유는 가급적 폭넓게 인정해야 하는 점 등을 무죄 이유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