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 ‘3시간’…지하철 기관석 타보니..

      2012.03.29 16:34   수정 : 2012.03.29 16:34기사원문
검색창에 '지하철 5호선'이라 검색하면 지금은 '맥주녀'와 '담배녀' 기사가 쏟아지지만, 이 곳은 얼마 전 한 기관사가 병마와의 외로운 싸움 끝에 생을 마감한 곳이다. 지난 12일 오전 8시께 왕십리역에서 근무를 마친 지하철 기관사 고(故) 이재민 씨(43)는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씨가 '공황장애'를 앓으며 고통 받아 왔음이 드러난 이후 지하철 기관사들이 처한 환경이 재조명 됐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변화는 없는 상황. 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서서히 희미해질 무렵이던 27일, 기자는 지하철 기관석에 직접 탑승해 5호선 기관사 김영훈 씨(가명·38)와 '지하철 기관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약속한 시간에 객실의 맨 앞에 탑승하자 기관석 문이 열리며 김 씨가 반갑게 맞았다. 옆으로 움직이는 지하철이 익숙한 기자가 이리저리 흔들리자 김 씨가 옆에 놓인 조그마한 의자를 내밀었다. 복잡해보이는 계기판의 빨간 불빛은 '자동 운전'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철을 얼마나 운전했냐는 물음에 김 씨는 "거리로 치면 지구를 6바퀴 정도 돌았을 것"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지하철을 운전한 경력만 10년이 넘는 그는 소위 말해 '베테랑 기관사'였다.

■자살한 이 씨…지하철 기관사의 '외로움'

역 몇 개가 지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연스레 자살한 기관사 이 씨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 씨는 숨진 이 씨에 대해 "직접 알진 못하고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면서 "공황장애로 고통 받았어도 분위기상 병명을 말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전체 기관사 중 공황장애 환자만 10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지금 있는 곳에서만 4명 정도 봤다"면서 "일반인에게 발생하는 공황장애 환자의 7배가 넘는 수치라 들었다"고 설명했다.

기관사로 일하며 느끼는 외로움은 어떨까. 김 씨는 "예전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괜찮아졌다"면서 "운전 시간이 4시간 40분 가량 되는데 비유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터널로 된 곳만 지난다고 보면 된다"고 답했다. 그가 일하는 지하철 5호선은 모든 역이 지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어 "기관사들끼리 '공황장애를 극복하려면 영어단어라도 외우라'고 한다"면서 "이런 환경이 공황장애 환자들에겐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관사 근무 시스템의 특성상 1인 근무 체제, 교대 근무이기 때문에 함께 모여 넋두리하기도 쉽지 않다. 김 씨는 "근무 시간대가 달라 동료와 술 한 잔하려면 5시간 기다려야 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열차가 나아갈 수록 터널 속 짙은 어둠은 삼킬듯이 쏟아져 왔다. 객실에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이었다. 다가오는 형광등 불빛만이 일정한 주기로 눈가를 두드렸다. 고요한 터널 속에 '덜컹 덜컹'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지자 그의 말이 다시금 전해졌다.

■10년 잘해도 1번 잘못하면 바로 '뉴스'에..

역에 도착하자 김 씨는 CCTV와 측면에 놓인 거울로 승객들이 모두 탔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스크린도어가 모두 닫겼다는 초록색 등이 켜진 후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김 씨는 '불특정 다수'인 승객과 함께 일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그는 "보통 덥다, 춥다는 민원이 가장 많고, 왜 늦게 왔느냐. 문에 끼었다 등이 대부분"이라면서 "예전에는 민원이 발생하면 실적에도 반영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진 않다"고 답했다.

또 "10년 동안 운전을 잘했어도 1번 잘못하면 뉴스에 나오는 직업이 기관사"라면서 "워낙 많은 승객들을 책임지는 일이라 매순간 긴장 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승객들의 민원에 대해서도 사측이 '원칙'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기관사의 불찰이 명확하다면 당연히 인정하고 사과하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승객들에게 직접 가서 사과하라 요구하는 등 무리한 부분도 많다"면서 "이런 부분에서 원칙을 정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답답했던 터널 속 공기…기관사, 차장 동시 역할 힘들어

종점인 마천역에 다다른 후 김 씨는 "반대편으로 가 있으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왼켠에는 용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마련한 소변기가 놓여 있었다. 객실 중간엔 채 내리지 못한 승객 한 명이 곤히 잠들어 있어 김 씨가 흔들어 깨웠다.

반대 방향으로 열차가 출발하자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역에 서고 승객을 태우면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기관석에 탄 지 1시간 30분 가량 지났을 무렵, 공기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져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김 씨는 "조금만 더 있으면 목이 아플 수도 있다"면서 "스크린도어 설치로 사상사고는 줄었지만, 터널 내 먼지가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흙냄새도 나고 그렇다"고 설명했다.

근무 환경에 대해 더 묻자 김 씨는 "지하철 1~4호선의 경우 기관사와 차장의 역할이 나눠져 있는데 5호선부터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하는 '1인 근무체제'이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면서 "열차 몇 량 이상은 기관사 2명이 함께 탄다고 규정돼 있는 일본처럼 법제화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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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열차에서 내리면 아이디어를 내거나 봉사활동을 해야하는 실적 경쟁 등 근무 외적인 부분에도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면서 처우 개선을 바라기도 했다.
결원이 생긴 기관사가 즉각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번에 기관사를 새로 뽑는데 6년만"이라면서 기관사 인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종착역에 도착해 내릴 때가 된 기자가 감사하다 전하자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엔 혼자 와야 되서 외로운데 말벗이 있어 빨리 왔네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humaned@fnnews.com 남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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