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에서 보는 평화

      2015.07.29 16:50   수정 : 2015.07.29 16:50기사원문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폭탄 공격을 당한 곳.' 일본 히로시마에는 당시(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념물이 곳곳에 있다. 시내 중심가의 평화기념공원에는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 자료관에선 불타버린 도시락과 신발의 잔해, 온 몸이 거의 불타버린 피폭자들. 그리고 히바쿠샤(피폭자들)의 증언을 기록한 영상이 쉼 없이 상영되고 있다.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는 이를 계기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왔다. 전 세계 6200여명의 시장들이 가입한 '평화의 시장'이라는 민간단체를 주도해왔다. 이 단체는 미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 지도자들에게 히로시마를 방문해 참상을 보고 절대악인 핵무기를 폐기해달라고 당당하게 촉구하고 있다.


최근 평화학회 참석차 다녀온 히로시마에서 잠깐 짬을 내 원자폭탄 투하 현장을 둘러보았다. 참상을 곱씹으면서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왜 이런 참상을 겪었는지 아무런 배경 설명이 없다.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숨을 거둔 사람은 2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10% 정도가 강제징용되어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우리 동포였다. 당시 희생자들의 상당수는 민간인이었고 10대가 많았다. 그렇지만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켜 잔혹행위를 저질렀고 핵무기 공격을 당한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념공원 어디에도 이런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일본 우익은 학계에서 통칭되는 태평양전쟁 대신에 대동아전쟁을 고집한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동북아를 지켜내기 위해 일본이 정당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논리에서다. 우익들은 이런 인식 틀에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강제징용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일본이 이처럼 침략전쟁을 부인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48~1949년 베를린 봉쇄를 거치면서 미·소가 대립하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지역세력으로 서독과 일본의 경제적 부흥을 지원하고 이들을 동맹국으로 받아들였다. 독일의 경우 소련과 프랑스 등이 나치 잔재의 청산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미국도 탈나치 정책을 철저하게 실행했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소련의 청산 요구가 독일에 비해 그리 강력하지 못했고, 미국도 일본의 군국주의 청산보다는 소련 억제라는 더 큰 적의 제어에 역점을 두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스 노부스케는 총리로 재직 당시(1957~1960년) 평화헌법의 개정을 시도했다. 그때가 1960년이니 2차대전이 종결된 지 채 15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국이 일본의 역사왜곡 시정보다 일본의 정상국가화를 우선해 온 것은 이처럼 역사적 뿌리가 깊다.

과거 70여년간 미국의 일본 중시 정책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대일정책은 지난 2년 반 동안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역사를 꿰뚫어보고 대일정책의 돌파구를 마련할 때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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