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아침
2017.09.18 17:03
수정 : 2017.09.18 21:41기사원문
호주머니에 시집을 꽂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20대 문청(문학청년) 시절 이야기다. 어머니 말마따나 시가 밥 먹여주진 않지만, 세상을 꼭 밥만으로 사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는 쉬이 밥이 되지 않았다. 재주가 없어 멋진 시를 짓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운좋게 시인이 되었다 한들 시로 밥을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 때문에 괴롭다고 썼는데, 나는 씌어지지 않는 시 때문에 하고한 날 머리를 싸맸다. 그러다 어찌어찌 직장을 얻어 사회에 나왔고, 시를 쓰거나 읽는 시간은 그 세월의 부피만큼 줄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엔가 전혀 시를 읽지 않는 시간이 왔다. 대략 마흔을 전후한 시기가 아니겠나 싶은데, 그 이후론 단 한 권의 시집도 사지 않았고, 단 한 줄의 시도 읽지 않았다. 그 10년의 세월은 시가 쌀 한 톨, 동전 한 닢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아가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십줄을 넘긴 요즘, 무슨 연유에선지 띄엄띄엄 시를 읽는다. 적극적인 독서라기보다는 그냥 쉬어가는 느낌으로 후루룩 읽어보는 수준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싶다. 꼭 한 권의 책으로 묶인 시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보내주는 오래된 시 한 줄이나, 매일 아침 조간신문에 한 토막씩 실리는 짧은 시와 해설을 읽는 것도 꽤 즐거운 경험이다.
'흥관군원(興觀群怨)'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찌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불러일으킬 수 있고, 관찰할 수 있으며, 무리 짓게 만들고, 원망할 수 있게 한다(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의역하자면, 시란 스스로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興),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며(觀),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알게 하고(群), 사무친 감정을 풀어헤칠 수 있게 한다(怨)는 얘기다. 이른바 '시의 효용'이다.
하지만 시가 꼭 무슨 쓸모가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읽는 것 자체로 즐거우면 그것으로 족하다. '무목적의 목적'이라든가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말로 시를 설명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빈 그릇의 텅 빈 공간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릇에 무엇인가를 소담스럽게 담아내기 위해선 필히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 그릇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세상의 만물은 유에서 생기지만, 그 유는 무릇 무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生於有,有生於無)"는 노자 '도덕경'의 문구가 새삼 실감나는 아침이다.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