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통공에 하얀 스케이트, 말은 좋지만
2018.01.24 17:09
수정 : 2018.01.24 17:09기사원문
정부 신년보고도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기재부 보고서가 그렇다. 맨 앞장에 만화가 그려져 있다. 이정문 화백이 1965년에 2000년대의 생활상을 그린 미래만화다. 전기자동차와 태양열을 이용한 집이 보인다. 기재부는 '미친 생각?'이란 제목을 달았다. 당시엔 미친 생각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현실이 됐다는 뜻이다. 기재부는 또 '하얀 스케이트' 사진도 실었다. 노르웨이 출신 소냐 헤니(1912~1969년)라는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관행이던 까만 스케이트와 긴 치마 대신 하얀 스케이트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다. 헤니는 올림픽 3연패, 세계선수권 10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하얀 스케이트' 사진에서 기재부의 혁신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무술통공(戊戌通共)을 혁신 화두로 삼았다. 약 230년 전 정조가 편 개혁정책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본떴다. 사농공상 서열이 지배하던 때 신해통공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당시엔 시전(市廛)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했다. 카르텔 밖의 다른 상인이 점포를 차리면 때리고 쫓아냈다. 정부가 그런 권한을 줬다. 이를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한다. 정조가 이를 뒤집어 누구나 시전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기득권을 뛰어넘은 혁명적 발상이다. 이는 조선 후기 상업자본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집권세력은 시전 상인들의 뒷배 노릇을 했다. 정조는 고질적인 정경유착에도 칼을 댄 셈이다.
무술통공과 하얀 스케이트 발상은 참신해서 좋다. 문제는 실천이다. 문 대통령은 "혁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요란한 다짐과 달리 혁명적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수도권 입지 규제를 어떻게 풀지, 낡은 은산분리 규정을 언제 폐기할지에 대해선 입을 꼭 다물었다. 이래서야 말의 성찬에 그칠 것이란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정부가 나열한 정책 리스트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정부가 거창한 목표를 세울수록 민간이 설 자리가 줄기 때문이다. 그것도 재탕, 삼탕이 수두룩하다. 앞으로 혁신 보고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뭘 하겠다가 아니라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뒤에서 지원한다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얼마 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금융관료를 3분의 1로 줄이면 금융산업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관료들은 이 말을 곱씹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