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와 김여정의 '죗값'

      2020.06.17 17:58   수정 : 2020.06.18 15:43기사원문
두 여인으로부터 '죗값' 얘기를 들었다. 92세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를 향해 죗값을 치르라고 일갈했다. 32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남한 당국자들의 죗값을 거론했다.



이 할머니는 지난달 25일 윤 당선자에게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김 부부장은 지난 13일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남김없이) 받아내야 한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세상에 죄짓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살면서 죗값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섬뜩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다.
남과 북, 60년이라는 긴 세월의 강을 훌쩍 뛰어넘어 훅 하고 뇌리에 꽂혔다.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30년 묵은 회한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꾸짖는 느낌이 강했다. 김여정의 독설은 의외였다. 4살 터울 오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담배 재떨이를 들고 있던 단아한 미모에 수줍은 미소의 '착한 여동생'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나쁜 경찰'로의 변신 같다.

결과는 어땠나. 이 할머니의 "30년을 끌고 다니면서 이용해 먹었다" "용서는 없고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절규는 메아리가 되었다. 당사자는 쏟아지는 사퇴 압력을 이겨내고 국회의사당에 무사 입성했다. 할머니가 원하는 죗값의 대상과 목표는 명확했다. 윤 의원의 입신출세에 대한 배신감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기부금 내역과 용처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정부와 여당 그리고 진보진영의 비호를 받는 윤 의원이 그 죗값을 치를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김 부부장이 말하는 죗값의 대상과 해소법은 불분명하다.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막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지 못한 잘못을 누구에게 어떻게 지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하다.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3대째 대물림하는 백두혈통 집안처럼 일사불란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그 대신 '말폭탄'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확실했다. '당 중앙'으로 등극한 북한 권력서열 2위의 한마디에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납작 엎드렸다. 문제가 된 대북전단은 백해무익하다며 엄단 대책을 내놨다. 위헌 논란을 무릅쓰고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두 여인의 죗값에 대한 반향과 실현에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지옥에서 살아남은 할머니는 30년간 품은 용서할 수 없는 죗값을 호소했지만 무엇 하나 건진 게 없다.

권력자 김여정의 기세는 등등하다. 경고한 지 사흘 만인 16일 개성의 4층짜리 연락사무소와 15층짜리 지원센터를 폭파시켰다. 우리 세금 710억원을 들여 지은 건물이다.
폐쇄된 개성공단에는 9000억원어치의 우리 기업 자산이 잠겨 있다.

평범한 장삼이사는 안다.
죗값의 무게와 의미를. 죗값이란 인간 욕망이 낳은 부질없는 대가의 요구라는 것을. 또 죗값의 해원(解원)은 인간의 영역 밖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92세 할머니의 일평생을 건 호소가 무위로 돌아가는 건 마음 아프지만, 32세 권력자의 철부지 행동엔 걱정이 앞설 뿐이다. '진정한 죗값'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생명을 해칠 때 치르는 게 세상 이치이거늘.

joo@fnnews.com 노주석 에디터 정치 경제 사회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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