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백신!

      2020.12.28 18:00   수정 : 2020.12.28 18:00기사원문
말짱 거짓말이었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20개국(G20) 지도자들은 화상 정상회의에서 코로나 백신이 모든 이에게 적정한 값에 공평하게 보급되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백신은 글로벌 공공재라고 칭송했다.

입에 침이나 바를 것이지. 백신이 나오기도 전에 선진국들은 사재기에 나섰다. 입도선매한 물량이 속속 드러났다. 미국이 앞장서고 영국, 유럽연합(EU), 일본, 캐나다도 뛰어들었다.
캐나다는 전 국민의 5배 물량을 쟁여두었다.

개발도상국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진작 각자도생에 나섰다. 브라질은 중국산 백신의 임상시험실을 자청했다. 인도네시아, 터키에서도 중국산 백신 실험이 진행 중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비롯한 중동 여러 나라는 벌써 사용 승인을 내줬다. 중국 정부는 오는 2월 중순 춘제(설)를 앞두고 자국민 5000만명을 대상으로 집단면역에 나선다.

브라질이 어떤 나라인가. 과거 C형 간염 치료제 소포스부비르(제품명 소발디)를 놓고 글로벌 제약사 길리어드와 대판 싸운 전력이 있다. 약값이 너무 비싸다며 신약 특허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 일로 다국적 제약사를 옹호하는 미국 정부와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을 놓고는 미국과 한편에 섰다.

지난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팬데믹 특수상황을 이유로 백신 특허를 유예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자국 제약사들이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는 뜻이다. 미국 등 선진국은 손사래를 쳤다. 여기에 어라, 브라질도 가세했다. 브라질에선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얀센(존슨앤존슨 계열사)의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아쉬울 게 없는 셈이다. 얄밉지만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백신은 인류의 공공재라는 고담준론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한국은 순진했다. 선진국 그룹에 끼지도 못하고 개도국 동아리에서도 빠졌다. 행여 G20 선언문을 철석같이 믿었다면 국제정치학의 ABC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현실을 인정하자. 우린 백신 확보에 뒤졌다. 세상은 백신 접종국과 비접종국으로 나뉘었다. 올 겨우내 해외 접종을 그저 구경만 해야 한다.

답답해서 전문가에게 물었다. 한국은 바이오 위탁생산(CMO) 강국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약은 못 만들어도 설계도만 주면 생산은 척척 한다. 앞서 아스트라제네카는 SK바이오사이언스와 CMO 계약을 맺었다. 그럼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도 비슷한 계약을 맺으면 되지 않나? 화이자·모더나는 생산량을 늘려서 좋고 우린 백신을 생산해서 좋고 일석이조 아닌가? 아서라, 턱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바이오 제약사라고 다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SK바이오는 경북 안동에 L하우스라는 백신 공장이 따로 있다. 삼바 등이 새로 공장을 짓고 검증을 거쳐 제품을 생산하는 데 적어도 1년6개월, 길게는 2년이 걸린다.

이정동 교수(서울대·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는 "한국 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말한다('축적의 길'·2017). 개념설계란 백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능력이다. 거기서 코로나 백신 같은 신약이 나온다. 바이오 시밀러나 위탁생산은 신약에 비하면 몇 수 아래다.
코로나 백신 소동으로 우리 실력이 드러났다. K방역은 칭찬할 만하지만 K백신은 아직 멀었다.
백신 없는 겨울 내내 우리가 곱씹어야 할 교훈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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