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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홀리와 제시카 살인사건/원종원 런던특파원

주장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2.18 10:31

수정 2014.11.07 11:46


세밑 영국이 희대의 아동 살해사건 재판으로 시끄럽다. 지난해 변사체로 발견된 두 명의 십대 소녀 홀리 웰스와 제시카 채프만의 죽음을 둘러싼 오랜 법정 시비가 마침내 종료됐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성팬으로 눈에 잘 띄는 빨간색 축구 유니폼을 즐겨 입던 아이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한 것은 2002년 8월4일의 일이다.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이들은 방과 후 한 소녀의 집에서 바비큐 식사를 한 후 늘 다니던 골목길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1주일여가 지나 실종 사실을 언론에 전격 공개하고 나섰다. 작은 단서라도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신문과 방송들은 일제히 사건 당일 두 아이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제보를 호소하고 나섰고, 영국 전역에서 사라진 아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바라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아이들이 살던 케임브리지의 소햄 지역은 특히 범죄와는 거리가 먼 아늑한 전원 마을이라 영국인들의 충격과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명의 자원봉사단이 결성됐고, 인근 지역의 탐문수색이 시작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홀리와 제시카는 사건발생 18일째인 8월17일, 소햄에서 조금 떨어진 서포크 지방의 라켄히스 인근 배수로에서 불에 탄 변사체로 발견됐다.

아이들의 마지막 목격자였던 이안 헌틀리(29)가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녀들이 다니던 소햄 빌리지 초등학교의 관리인이었던 그가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은 아이들이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를 깨끗이 세차하고 아직 수명이 남은 네 타이어를 모두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동 수사에서 헌틀리의 여자친구인 맥신 카(26)는 아이들이 사라질 당시 헌틀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증언함으로써 결정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헌틀리는 자칫 수사선상에서 제외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이었던 참여는 사건의 전개를 극적으로 돌려놓았다. 영국 언론에서 헌틀리와 카의 알리바이에 대한 보도와 이들의 인터뷰를 본 일단의 사람들이 헌틀리가 아동 성범죄의 용의자였었다는 제보를 경찰에 보내왔다. 증거 불충분으로 구형이 언도되지 않았지만 그는 수년 전 그림스비에서 발생했던 11세 여자아이의 성폭행 용의자였던 적이 있었으며, 초등학교 구직시 이를 알리지 않았던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경찰은 카의 텔레비전 인터뷰를 면밀히 분석했고, 마침내 헌틀리와 함께 있었다는 시간과 그녀가 인근 술집에 들렸던 때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 수사가 빛을 발한 것은 이때부터다. 수사의 총책임자였던 크리스 스티븐슨 경무관은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려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집요한 수색과 조사 끝에 마침내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한 창고 쓰레기더미 안에서 타다 남은 빨간 축구 유니폼이 발견됐다. 그곳에는 헌틀리의 머리카락 두 개와 지문이 남아 있었고, 그밖에 옷에 묻어 있던 49개의 털 조각들도 역시 헌틀리의 옷이나 그의 집에 있는 카펫, 커튼 등과 일치했다. 헌틀리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카펫 위에 남은 한 아이의 혈흔이 발견됐고, 아이들 핸드폰의 종료 시그널이 마지막으로 수신됐던 지구국이 바로 헌틀리의 집 근방에서만 연결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1월3일, 마침내 살해사건을 둘러싼 헌틀리의 재판이 시작됐다. 영국 언론에서 매일같이 법정 기록을 생생히 전달하는 가운데 법원 주변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단을 포함, 소녀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영국 시민들의 조화(弔花)들이 가득했다. 애초 아이들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던 헌틀리도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아이들의 죽음이 자신의 집에서 일어났음을 시인하고 나섰다. 이후 법정 공방은 우연한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이에 당황한 나머지 사체를 유기했다는 헌틀리측의 주장과 미성년 성폭행에 의한 계획적 살인임을 밝히려는 검사측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현지시간 17일 마침내 배심원 12명 중 11명이 헌틀리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두 번의 생애에 걸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위증으로 수사에 혼란을 가져왔던 카도 3년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구형이 내려지는 순간 아이들의 부모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음을 터트렸고, 소햄 주민들은 “정의가 마침내 실현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10세짜리 꼬마 소녀-홀리와 제시카 살해사건은 현대 범죄 수사에 있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주도면밀한 과학수사를 벗어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영국판 ‘사필귀정’의 귀감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원종원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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