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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책돋보기-너무도 하얀 마음]신혼여행서 갓 돌아온 테레사의 자살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8.31 13:37

수정 2014.11.07 14:36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신부가 신혼여행 가방을 채 풀기도 전에 아무런 연유도 없이 관자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감행하는 쇼킹한 장면으로 하비에르 마리아스(1951∼)의 소설 ‘너무도 하얀 마음’(1992)은 시작한다. 하루아침에 마리아스를 생존 스페인 작가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만든 이 소설의 집필 동기는 실제로 이렇게 자살한 어머니의 사촌의 이야기에서 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하루아침에 당대 최고의 작가로 만들어준 소설 ‘너무도 하얀 마음’이 1992년 출간되기 이전에는 마리아스는 작가라기보다는 번역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람 샌디’의 번역으로 스페인 유수의 번역상을 수상하기도한 마리아스는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스페인 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마리아스의 아버지는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철학자였기에 수차례의 투옥과 강의금지 조치를 당하기에 이르러서 한동안 미국 동부의 대학에 머물러야 했다.

따라서 마드리드 태생의 마리아스 역시 한동안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귀향 후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마리아스의 문학세계는 스페인 문단에서는 너무나 영국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는 일상에서 함몰되어지는 사랑과 위선의 문제이며, 그의 문체는 수많은 고전들의 인용을 적절히 활용한 인터텍스트적 글쓰기를 특징으로 한다.

소설은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테레사가 갑자기 쇼킹한 자살을 감행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이제는 테레사의 자살사건은 이미 모두 잊혀지고 수십 년이 지나고 죽은 테레사의 남편 란츠가 테레사의 여동생 후안나와 다시 결혼하여 낳은 후안의 신혼 여행이야기로 넘어간다.

후안은 여행지에서 옆방 연인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데,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인은 그에게 부인을 살해하라고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동시통역사로서 언어의 섬세한 뉘앙스와 화자의 심리상태에 대한 능통한 후안은 우연하게 들은 이 대화를 통해서 테레사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된다.
아버지 란츠가 테레사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다른 여인과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안은 파헤쳐내고, 후안의 신부 루이자는 란츠에게서 사건의 진실을 듣게 된다. 란츠는 테레사와 결혼을 위해서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을 살해하였고, 신혼여행에서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테레사는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제목 ‘너무도 하얀 마음’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인용한 것인데, 국왕의 살해를 도모한 맥베스의 부인이 말하는 ‘나의 두 손은 너의 손과 마찬가지로 피로 얼룩져 있지만, 나의 마음은 너무도 하얀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라는 문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김영룡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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