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낙태,이를 어찌할꼬?/곽인찬 논설위원



잘 아는 의사 한 분이 의대 동창생들과 함께 병원을 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병원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병원에 산부인과가 있었던 게 탈이었다. 요즘 산부인과라는 게 출산만 갖고는 수지를 맞추기가 힘든 모양이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다보니 산모 수가 푹 줄었다. 마취 전문의인 이분은 어쩔 수 없이 임신중절을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환자를 마취해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성격이 담백한 이 분은 자신이 낙태에 동참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병원을 나왔고 지금은 예전처럼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이 병원 저 병원에서 호출이 있을 때 응하는 식이다. 낙태 수술 마취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이다. “병원에 소속돼 있을 때보다 돈벌이는 못하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 산부인과 또는 마취과 의사들이 모두 이 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낙태천국이란 오명을 뒤집어 썼을 리가 없다. 낙태는 현재 그 실태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국내에서 몰래 그러나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환자든 의사든 당사자들이 입을 꽉 다무는 낙태의 속성상 정확한 숫자 파악은 애시당초 힘들다.

그나마 공식 통계로는 지난해 9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전국 인공 임신중절(낙태) 실태조사’ 보고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낙태 시술 건수는 35만여건으로 추산된다. 이 중 미혼여성이 14만7000여건으로 42%를 차지한다. 공식 통계가 이 정도다. 비공식 통계를 보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낙태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은 해마다 100만∼150만건의 낙태가 행해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백보 양보해 공식 통계가 맞다고 쳐도 지난해 낙태 건수는 출생아 수(43만8000명)의 80% 수준에 이른다. 신생아 10명이 태어나는 순간 태아 8명은 쥐도 새도 모르게 생명을 잃는다는 뜻이다.

만에 하나 비공식 통계가 진실에 가깝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 땅에서 태아가 목숨을 건지려면 천운을 타고 나야 한다. 세계 최저 출산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낙태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이제 낙태를 국가적 차원에서 다룰 때가 됐다. 윤리·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별도로 장차 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낙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쉬쉬하며 감출 게 아니라 양지로 끌어내 사회적 어젠다로 삼아야 한다.

현행법상 낙태는 기형아 출산이나 강간, 산모의 건강 위협 등 특별한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 그러나 이들 법은 사문화한 지 오래다. 낙태의 42%를 미혼모가 차지하고 있다는 복지부의 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형법은 불법으로 낙태한 산모와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허울 뿐이다.

사실 낙태를 전적으로 법에 의존해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는 미혼모가 애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형성하고 보육을 지원하는 게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입양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기혼자의 경우 터울 조절에 실패한 아이, 원하는 성별이 아닌 아이도 기꺼이 낳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먼저다.

결국 낙태 문제는 장기적인 저출산 대책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새로마지 플랜 2010)’ 시안에는 낙태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어 유감스럽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낙태를 놓고 반대파(Pro-Life)와 찬성파(Pro-Choice)가 대립한다. 찬반을 기준으로 보수-진보가 갈리기도 한다.
대통령 후보들은 입장을 밝히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규범이 정립된다. 내년 대선에서는 우리 후보들도 낙태 공약을 정식으로 내놓을 것을 제안한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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