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정치권력과 보수언론/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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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탐탁잖게 여기던 차에 “그래도 역시 인물”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4월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주최한 만찬 모임에서의 일이다. 초청을 받은 부시 대통령이 뜻밖의 인물과 함께 나타났다. 그와 쏙 빼닮은 코미디언 스티브 브리지스였다. 복장도 같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연설을 시작했다. 부시는 대통령의 겉모습, 브릿지스는 부시의 속내를 맡기로 역할 분담이 이뤄져 있었다.

브리지스가 “언론 때문에 정말 열 받아. 이 자들은 내가 말하는 걸 편집 없이 그대로 실어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애쓴다니까”라고 말하자 부시는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고 정중하게 받았다.

부시는 자신의 잦은 말 실수도 기꺼이 소재로 삼았다. 브리지스는 휴회 기간 중 의원들을 만나 정책을 설명하는 ‘인터세셔널 콘택트(Intersessional contacts)’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부시는 이를 ‘인터섹셜 콘택트(Intersexual contacts)’로 되받았다. ‘휴회 중 접촉’이 ‘이성 간 접촉’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만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3년 반 동안 줄곧 치고받기

부시와 언론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 않다. 부시가 정권을 걸고 감행한 이라크 전쟁에 대해 뉴욕타임스지 등 주류 언론은 실패한 정책이라며 연일 비판하고 있다. 감세에 대해서도 부자만 살찌울 뿐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런 팍팍한 관계 속에서도 대통령과 언론은 때때로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부시는 촌극 한편으로 자신의 도량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노무현 대통령과 주류 보수 언론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은 불행한 일이다. 권력과 언론의 건전한 긴장 구도는 실종된 지 오래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듯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전형적인 노사분규를 보는 듯하다.

정부 정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보수 언론의 공격은 집요하다. 한 신문은 8·31 부동산 정책 1년을 맞아 부동산 중개업소 앞에 걸린 매매 가격을 1년여 전과 비교하는 사진을 실었다. 결론은 정책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눈길을 확 끄는 1면 상단에 배치해 편집은 신선했지만 감정이 앞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가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아보자며 내놓은 ‘비전 2030’ 보고서는 장밋빛 환상, 꿈, 소설로 평가절하됐다. 아예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는 식이다.

정권은 정권대로 맞불을 놓고 있다. 비판을 흔쾌히 수용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청와대 브리핑’을 통한 특정 신문 때리기와 잦은 소송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일관된 언론정책이다. 정책 실패 또는 정책의 추진력 상실을 언론 탓으로 돌리는 버릇도 여전하다. 권력을 견제하고 여론을 전하는 언론의 본질적인 기능조차 외면한 채 20% 안팎의 지지율로 ‘마이 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지난 3년 반 내내 권력과 주류 언론이 쉴새 없이 싸우는 동안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언론이 지켜야 할 형평성은 행방불명 상태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때

이제 양쪽이 한발씩 뒤로 물러설 때가 됐다. 그래야 나무가 아니라 숲이 보인다. 정책이 아니라 나라가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과 386 세력이 싫다고 조건반사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닌지, 보수언론이 싫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닌지 차분히 짚어볼 때가 됐다.

세상만사 결국은 사람끼리 하는 일이다. 쓸데없이 상대방을 자극해 득될 게 없다.
감정이 절제된 비판, 그 비판을 수용하는 대범함이 그토록 힘든 일인가. “신문이 너무 흔들어서…”라는 불평은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대통령과 언론이 사심 없이 전 국민 앞에서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실마리를 권력이 제공하면 금상첨화이겠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