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국민연금 엑소더스/곽인찬 논설위원



국민연금 탈출이라니,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온다.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모를 국민연금을 버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사학연금으로 엑소더스를 감행하겠다는 건가.

국민연금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슬쩍 배를 갈아탔다. 참 얄밉다. KDI는 그동안 연금 고갈의 위험성을 알리는 깃발을 쉴 새 없이 흔들어왔다. 이 국책 연구기관이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개혁의 시동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놓고 자기들만 쏙 빠졌으니, 이건 도덕적으로 일종의 내부자 거래가 아닐까. 두뇌 회전 빠른 박사님들이 온 세상에 대고 “국민연금은 난파선”이라고 외친 셈이다. 그러니 국민연금 꼬박꼬박 내는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어쩌란 말인가.

KDI는 도덕성을 잃었다. 앞으로 연금 개혁에 대해 어떤 지혜로운 방안을 제시해도 “됐거든,” 비아냥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하긴 KDI 고급 두뇌들만 뭐랄 것도 없다. 연금 개혁 굴러가는 품새가 하나같이 탈출을 충돌질하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며칠 전 지지모임인 ‘참여시민광장’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적절한 때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출마 가능성을 강하게 풍기는 뉘앙스다. 그러려고 장관직을 내놓은 모양이다.

그가 장관에 임명됐을 때 국민연금 개혁에 성공하길 진심으로 원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힘센 장관의 복지부 입성을 환영했다. 유 전 장관은 여의도에서 과천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정치인 모드’에서 ‘근신 모드’로 전환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일했다. 여야 의원들의 비협조에 시달리면서도 복지위-법사위를 거쳐 국회 본회의까지 개혁안을 끌고 갔다. 그 사이 그에 대한 평가, 이미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본회의에서 개혁의 몸통은 부결되고 깃털에 해당하는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 원인을 놓고 정치인 유시민에 대한 범여권의 견제 때문이란 분석이 나왔다.

할 만큼 했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스스로를 개혁의 걸림돌로 여긴 걸까, 유 전 장관은 장관직을 내놨다. 화룡점정 직전의 아쉬운 결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혁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선 출마 뉘앙스를 풍기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유 전 장관이 “적절한 때 좋은 결정”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진정성에 의문이 들었다. 역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구나 하는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연금 개혁의 선봉장은 낙마했고 공은 국회에 넘어가 있다. 그 국회가 지금 갈팡질팡이다. 여당은 핵 분열 중이고 제1 야당은 대선 후보 줄서랴, 내년 총선 챙기랴 정신이 없다. 귀찮은 연금 개혁은 여야 가릴 것 없이 표만 안 떨어지면 된다는 식이다. 노인 표? 노령연금 도입합시다. 유권자들이 보험료 더 내는 걸 싫어한다고? 그럼 그대로 내고 덜 받는 방식으로 합시다. 바로 이렇게 바꾼 개정안이 6월 임시국회에서 표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래서는 연금 고갈 시기를 몇 년 뒤로 늦출 뿐이다. 국민연금 개혁이 땜질로 끝나면 공무원·사학 등 특수직 연금의 개혁은 물 건너 간 걸로 봐야 한다.
유 전 장관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공무원들, 두뇌집단 KDI를 우군으로 확보한 사학연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거다.

차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다시 던진다. 이럴 바에야 나라가 돈을 걷어 나눠주는 ‘그 놈의’ 국민연금 제도를 과연 존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생돈 내면서 행여 못 받으면 어쩌나 불안에 떠는 불만 투성이 제도를 왜 꼭 유지해야 하는가. 시장경제 체제에서 노후는 알아서 책임지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가. 국가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이들만 돌보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