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나머지’의 반란/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11.16 17:00

수정 2010.11.16 17:00

이달 초 미국이 6000억달러(약 660조원) 규모의 2차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했을 때 나는 큰 판단 오류를 범했다. 6000억달러는 시장의 평균 예상치를 웃돌았지만 크게 벗어난 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이 2차 양적완화에 나선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나는 미국의 결정이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요컨대 6000억달러는 경주에서 G20 재무장관들이 합의한 ‘통화절하 자제’의 범주 안에 있다고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웬걸, 6000억달러에 세상은 뒤집어졌다.
잘 걸렸다는 듯 중국이 앞장섰고 독일과 브라질이 그 뒤를 바싹 따랐다. 미국에 대고 감히 “해명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6000억달러 ‘돈폭탄’이 달러 약세를 부추겨 미국산 제품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려는 환율조작의 혐의가 짙다는 게 3국 연합의 주장이었다. 졸지에 미국은 환율조작국 신세가 됐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미국을 편들지 않았고 맹방 한국의 중앙은행은 정상회의 개막일(11일)에 맞춰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실물경제에 주는 효과는 작고 오히려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고 우려하는 보고서를 내놨다.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마저 “미국이 통화 약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며 천기(天機)를 누설했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즉각 CNBC 방송에 나와 “그린스펀을 매우 존경하지만 우리는 통화 약세로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는다”며 예전 상관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린스펀이 FRB 의장일 때 가이트너는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로 돈독한 관계였으나 이번 일로 둘 사이가 어색해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협상이 쇠고기에 발목이 잡혀 결렬된 것도 뜻밖이다. 쇠고기라는 특수 사정이 있다 해도 대미관계를 중시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친구’ 오바마 대통령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것은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다. 일본이 잘 나갈 때 일부 보수·우익 인사들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꿈꿨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손님을 불러놓고 ‘노’라고 말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미국의 영향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건가 아니면 G20 의장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이 부쩍 높아진 건가. 워싱턴포스트지는 “60년 전 한국전쟁에서 약 4만명의 미국 군인이 희생했고 지금도 서울을 지키려 수만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에서 FTA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대미 공세는 시작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G20 차기 의장국인 프랑스는 통화 시스템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평소 미국에 삐딱하게 굴던 프랑스의 자세로 볼 때 빈말이 아닐 것이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가 불을 지핀 기축통화 전면 개편 문제도 칸 정상회의의 안건으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대영제국의 영광과 몰락이 파운드와 운명을 같이 했다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광과 몰락은 달러와 운명을 같이 할 공산이 크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金) 태환 정지를 선언했을 때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달러가 종잇조각이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의 신 풍속도다. 미국 정부가 풀죽은 경기를 살리려 더 많은 돈을 풀수록 달러 가치는 떨어지게 돼 있다.

화폐 가치는 ‘네트워크 효과’의 결과다. 더욱 많은 사람이 그 화폐를 지불수단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네트워크가 끊어지는 순간 그 화폐는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 시대의 독일 마르크나 현재의 북한 원 꼴이 된다.

역작 ‘포스트 아메리칸 월드’(2008년)의 저자 파리드 자카리아는 세상을 바꾸는 ‘나머지의 부상(Rise of the Rest)’에 주목한다.
그는 “이 책은 미국의 쇠락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부상’에 관한 책”이라고 애써 말한다. 문제는 속도다.
그는 중국·브라질·인도·한국 등 ‘나머지’의 부상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데 걸고 싶다. 그래야 내 판단 오류에도 체면이 서니까.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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