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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한국은 ‘초저(超低)’ 신뢰사회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02 17:17

수정 2014.10.30 18:27

[여의나루] 한국은 ‘초저(超低)’ 신뢰사회

나는 2003년도에 스웨덴,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을 방문했다. '톱다운(top-down)' 재원배분 방식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톱다운 방식이란 재원배분의 기본방향을 국가의 중장기 목표와 국정 철학에 맞춰 먼저 정해 놓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전제조건이 있다. 대통령이 장관들과 함께 '진짜' 토론을 하는 것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그런 토론회를 1박2일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선진국들이 밤을 새워 재원배분 회의를 하는 방법을 자세히 묻고 토론도 하면서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이런 제안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회의를 품었다. 대통령이 국가 재원을 직접 배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지는 일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재원배분 회의를 해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멋진 말로 장식된 회의 결과는 언론을 통해 발표됐지만 진정한 토론은 없었다. 속마음까지 다 드러내놓고 밤새워 국정을 이야기하는 장관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일까? 우선 '배석자' 문제였다.

스웨덴의 재원배분회의는 총리와 장관들만 참석하고 그야말로 '배석자'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달랐다. 당시 나의 주장으로 각 부처의 배석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막을 수 없었다. 정책실장이 배석하겠다는데 어떻게 막나? 기록비서관이 오겠다는데 어떻게 막나? 대변인이 오겠다는데 어떻게 막나? 경제수석, 사회수석, 외교안보 수석은 어떻게 막나? 결국 장관들은 수많은 배석자에 둘러싸여 이야기하는 꼴이 돼 버렸다. '국무위원'의 일원으로 국가 장래를 위한 진심 어린 발언과 양보는 구조적으로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오직 각계를 대표하는 '장관'만이 있었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퍼머넌트 컨피덴셜(permanent confidential)' 즉 '영구비밀' 문제였다. 스웨덴의 재원배분회의 토론 내용은 '퍼머넌트 컨피덴셜'이라고 했다.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말 그대로 토론 내용을 "영구히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묻고 또 물었다. "회의가 끝난 후 언론의 취재가 있을 텐데, 어떻게 대응하느냐?"고. 그들의 답변은 한결같이 똑 같았다. "영구비밀이라고 알려주면 된다. 그러면 그들(언론)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고. 나는 우리나라와 판이한 그들의 언론 환경이 당혹스러웠다.

우리나라 언론은 '퍼머넌트 컨피덴셜'을 양해해줄 수가 없다. 사회구성원 상호간에 신뢰가 낮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로 믿을 수가 없다. 결국은 발언 내용이 적나라하게 알려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수많은 농림단체, 농민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어떻게 농업 분야 사업을 양보할 수 있겠는가? 국방부 장관이 무슨 배짱으로 '장관'이 아닌 '국무위원'의 자세로 국방비 삭감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주재 재원배분회의는 각 부처 장관의 부처 이기주의 발언만 있었다. 장관들의 진정한 토론과 합의는 없었다. 1박2일로 숙박까지 예정됐던 대통령의 참석은 하루 만에 끝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사회를 '저(低) 신뢰사회'라고 규정한 것이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지난해는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문제로 1년 내내 시끄러운 한 해를 보냈다.

정상 간의 대화내용을 공개하자고 야단법석인 나라가 있을까? 한국을 '저(低) 신뢰사회'라고 한 것은 오히려 후한 평점 아닐까? 신뢰 부족으로 대통령과 장관들이 '진짜' 토론도 제대로 못하는 나라. 일급 국가 비밀도 유지되지 못하는 나라. '초저(超低)' 신뢰사회가 아닐까? 새해에는 서로를 믿는 신뢰사회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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