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ECB의 QE는 헛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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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이 하향 추세를 지속하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지기 전에 유럽중앙은행(ECB)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이 '뭔가'는 대개 대규모 자산매입 또는 양적완화(QE)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QE에 그런 능력이 있을까. 지금까지 논의는 간단히 예상할 수 있는 국가별 양상을 보였다. 채권국은 디플레이션을 반대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실질 투자가치가 오르기 때문이다. 반면 채무국 채무부담은 무거워진다.

폐쇄경제에서는 모든 신용에 관련 채무가 뒤따른다. 그렇지만 개별 국가를 상정하면 얘기가 다르다. 일부는 대규모 대외채무를 안고 있는 반면 다른 국가는 막대한 채권을 갖고 있다. 미국과 독일은 채권-채무의 양 극단이다. 미국은 자국 통화로 채권을 발행하는 '과도한 특권' 혜택을 통해 30년 넘게 경상수지 적자를 이어오고 있다. 미국의 대외채무(대부분 달러자산인)는 7조달러를 웃돈다. 이는 미국의 금리인하가 이자소득이 줄게 될 독일 같은 채권국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미국에는 이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까지도 대외수지가 균형에 가까웠던 유로존에서도 비슷한 채권·채무자 스펙트럼이 나타나고 있다. 독일과 네덜란드가 한쪽 끝에 있고, 유로존 남부 국가들이 다른 끝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QE에 대한 독일의 저항과 ECB에 추가 대응 압력을 높이고 있는 주변부 국가들의 적대적 입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런데 유로존에서 QE가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QE는 중·단기 정책금리가 이미 제로(0)인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장기 금리를 낮추기 위해 사용하는 특수한 정책수단이다. 이는 장기 (시장) 금리 변화가 민간 부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제에서만 QE가 효과적일 것임을 뜻한다.

유럽은 그렇지 않다. 투자는 대부분 은행 대출로 이뤄지며 만기는 대개 길지 않다. 통상 5년 미만이다. 게다가 여기에 붙는 금리는 시장금리에 연동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미 제로에 가까운 은행의 차환비용에 연동된다.

따라서 유로존의 경우 장기 국채 수익률을 떨어뜨리는 게 기업 부문의 자금조달 여건을 개선하고, 투자수요를 부추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조적으로 미국은 많은 투자가 채권 발행을 통해 이뤄지며 이는 은행 대출보다 만기가 길다. 더욱이 이들 채권 가격은 국채 수익률 커브에 좌우된다. QE가 기업 자본조달 비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시사한다.

가계의 경우 저금리 영향은 고정 모기지 금리를 통해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남유럽은 대부분 주로 변동금리를 활용한다. 이는 예컨대 모기지가 이미 제로에 가까운 단기(변동) 금리에 맞춰진 스페인 가계에는 QE의 영향이 없을 것임을 뜻한다.

미국의 가계는 모기지 금리가 떨어지면 앞당겨 갚을 수 있는 옵션이 있다. 또 모기지는 대개 증권화돼 있다. 이는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일단의 모기지 금리가 낮아지면 가계 지출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기 금리 하락은 통상 모기지 차환 흐름으로 이어지고, 가계의 월 모기지 부담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높아지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이면 주택을 포함해 모든 자산가격이 오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도 집값 상승이 소비를 자극하는 미국은 유럽에는 맞지 않는 모델이다. 미국에서는 주택보유 비중이 높고, 집 소유주들이 비교적 싼값으로 집을 증권화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금융시스템이 짜여 있다.

이는 대부분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불가능하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가 여전히 보수적이어서 차환에 돈이 많이 들고, 대부분 은행이 휴가나 새 차를 사기 위해 '주택 증권'을 통해 현금을 마련하려는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국 금융구조 차이가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노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QE가 미국처럼 유연한 금융시스템을 갖춘 채무국에서는 잘 작동할 수 있지만 보수적 금융체계로 짜인 채권국 경제에서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 ECB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국가들의 채권을 사들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닌 이것이 바로 유로존 QE를 반대하는 실질적 이유다.

대니얼 그로스 유럽정책연구원장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