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

(5)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 살아남아봤자 ‘조기은퇴’

은퇴; 평생직장의 꿈 지고 평생전쟁의 삶 떴다



모바일 설문조사 업체인 오픈서베이가 성인 1580명을 대상으로 '조기 퇴직과 노후 대비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기퇴직을 걱정해 보았느냐'는 질문에 30대는 '그렇다'는 응답이 45.1%, 40대 이상은 63.1%, 50대에는 76.8%로 나타났다. 이 정도면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직장인들 대부분이 퇴직의 공포를 안은 채 살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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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퇴직을 염려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를 묻자 '빨라지는 평균 퇴직연령대'(46.6%)를 가장 많이 꼽았다. 뒤 이어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회사의 인원감축'(32.3%)이 두번째 이유로 지목됐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사오정'이라는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조기퇴직이나 희망퇴직이 흔한 일이 됐다. 한 금융사에서 부장 직급으로 근무 중인 A씨는 "과거에는 승진하면 빨리 나가니까 천천히 올라가는 게 낫다는 말이 있었다"며 "그런데 최근에는 어차피 조기퇴직은 피할 수 없으니 승진이라도 하고 나가는 게 낫지 않냐는 말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런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직장인들은 틈만 나면 불어닥치는 구조조정과 조기퇴직의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매일같이 이른 출근, 늦은 퇴근, 주말 특근에 평일에는 야근까지 하면서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고 있다.



■끝없는 승진전쟁

고등학교 3년을 수도승처럼 살고, 대학교 4년을 스펙 쌓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간신히 회사에 입사하면 이제 모두 끝났나 싶겠지만 그 기쁨도 잠시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승진입시'가 직장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생활 하는 동안은 벗어날 수 없는 '고시생'에 비견되는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승진시험은 수능 보듯이 필기로 치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기업별로 간부급을 선발할 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외국어능력이나 업무와 관련된 자격능력 등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시장조사업체 엠브레인이지서베이가 직장인 4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4.4%가 반년 이상을 승진시험 준비에 매달린다고 응답했다. 외국어 수준부터 회계지식이나 각종 업무능력 평가에 대비한 스펙을 쌓기 위해 평소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이런 공부에 열중하는 비중은 높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공부는 더 힘들어지기 마련이지만 부장급의 40.7%와 임원급의 38.9%가 승진시험에 반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다고 응답했다. 공부 방법도 수험생 때와 다를게 없다. 승진시험을 준비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59.7%가 '매년 나오는 족보를 공부한다'고 답했다.

국내 기업들 중에서는 롯데그룹의 과장(책임) 승진시험이 유명하다. 전 계열사에 걸쳐 과장급 승진 절차로 전통적인 필기시험을 유지하고 있다. 전 계열사에서 대리가 된 지 3년차 되는 직원들이 응시생인데 대략 2시간 동안 치르며 회계이론, 전략경영, 조직행동론 등이 수험과목이다.

롯데그룹에서 과장 승진은 중간관리자가 된다는 의미다. 시험도 상당히 어렵지만 공부해야 할 분량도 방대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롯데 관계자는 "시험을 치르는 날 시험장 앞에 후배들이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들고 응원을 나오는데 수능 치를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며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과장 승진이 안되기 때문에 대리로 머물러야 하는 아픔이 있다"고 말했다.

■놓치면 죽는 인맥전쟁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소위 '줄' 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 종영된 케이블TV 드라마 '미생'에서 최 전무가 자신이 신뢰하는 부하직원들의 실적을 챙겨주고, 그 휘하에 있는 직원들은 전무의 승진을 위해 힘을 보태는 일이 실제 기업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사내인맥 쌓기, 또는 사내정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줄을 잡기 위한 물밑 작업은 직장인들이 겪는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이다. 엠브레인이지서베이의 설문에 따르면 승진하지 못하는 '만년 과장'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직장인들의 상당수는 '사내정치의 미숙'(54.7%)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못해서'라는 응답(30.3%)은 더 작았다. 상식적으로는 업무능력을 더 따져야 할 것 같지만,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내정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업무능력이 뒷받침되고 거기에다 사내정치까지 두루 통달해 있다면 인사고과, 실적에서 남들보다 앞설 수밖에 없고, 이는 곧 두둑한 연봉이나 성과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직장인들에게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A씨는 "입사시험을 거쳐 몇 년씩 경험을 쌓고 크다 보면 업무능력은 대부분 기본 이상이 되기 때문에 간부로 성장하려면 인맥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며 "힘들어도 유력한 상사 밑에서 근무하거나, 유력 부서로 이동하고 싶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봐야 결국 나간다

끝없는 승진전쟁을 치르고, 사내정치를 통해 유력한 '줄'을 잡아서 승승장구 했다고 치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직장인들의 '꿈'인 임원자리에 오르게 되면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다. 보수도 오르고, 차도 내어주고, 큼지막한 책상이 놓여진 방도 준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해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회사가 더 부려먹겠다는 의미다. 임원들은 또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이나 진배없다.

최근 승진한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은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7시 이전에 회사에 나와 일을 한다"며 "누구한테 보고를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선에서 결정하면 그대로 실행되는 일들도 있기 때문에 매순간이 긴장이다"라고 토로했다.



최근에 퇴임한 한 대기업 임원 출신 인사는 "임원생활 4년을 하면서 좀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달고살았다"며 "언제 찾을지 모르는 경영진들의 전화 때문에 시간이 나도 좀처럼 쉬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컨설팅업체 아인스파트너가 한국CXO연구소에 의뢰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0년 기준으로 국내 100대 기업 임원 5655명 중 1년만 활동하고 잘린 임원이 17.35%(139명)에 달했다. 이 정도면 승진이 아니라 구조조정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