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원화의 국제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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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은 해외로 나갈 때 은행에서 원화를 달러나 그 나라의 화폐로 바꿔 나간다. 기업들이 외국과 상품거래를 할 때도 대부분 미국 달러를 사용한다. 이처럼 우리 원화가 해외에서 국제적으로 직접 통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화의 국제화'가 안 됐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통화스와프 협정을 호주(45억달러), 인도네시아(100억달러), UAE(54억달러), 말레이시아(47억달러) 등과 맺었다. 2008년 중국과 체결한 560억달러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포함해 현재 5개국, 1290억달러 규모다.

과거 통화스와프 협정이 위기에 대비한 달러 확보가 목적이었던 데 비해 최근의 통화스와프는 서로 자국통화로 교환하는 LC(Local currency) 통화스와프 방식을 통해 무역결제 기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 있다. 통화스와프로 원화 사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본시장을 개방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간의 꾸준한 시장개방과 외환 및 자본자유화 추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화의 국제화 정도는 미약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달러 국제화 수준을 100으로 할 때 일본 엔은 47, 중국 위안은 35, 한국 원화는 24로 평가했다. 한·중·일 3개국 중 가장 낮다.

한국은 한 해 수출입 1조달러를 넘는 세계 8위 무역대국이지만 수출입 거래에서 원화로 결제되는 비중은 3% 미만으로 무역대금 결제에 막대한 거래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원화 결제가 확대된다면 환리스크 축소와 더불어 거래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은 당연하다.

한 나라의 통화가 국제화되면 해외 은행들은 해당국의 통화 예금업무를 취급하며 외국인은 그 돈을 자유롭게 빌리고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화폐가 갖는 계산단위, 교환수단 및 가치저장 기능이 해외로 확대되는 셈이다. 현재는 달러, 유로, 엔을 비롯해 호주달러, 캐나다달러, 싱가포르달러 등이 이 지위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등도 국제통화를 가지는데 왜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나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국제통화를 위한 기본요건인 경제.무역규모, 금융시장의 성숙도, 통화가치의 안정성 면에서 한국이 충분한 국제적 신뢰를 얻지 못하는 데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부에선 원화가 국제화될 때 발생할 수 있는 투기적 공격, 환율변동성 확대와 이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외환위기 등을 우려한 정부의 소극적 자세를 지적하기도 한다.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키 위해 먼저 원화의 리노미네이션(거래단위 변경)부터 선행돼야 한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말레이시아 통화가 달러와 한자릿수(3.5 내외) 환율이고, 규모는 크나 경제발전 단계가 뒤진 중국의 통화도 한자릿수(6.2 내외) 환율인 데 비해 원화는 4자릿수 환율이다. 많은 국민은 이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다.

과거 이탈리아 통화 리라가 1달러에 2000리라, 터키 통화 리라가 1달러에 100만리라였던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리라는 유로화가 되면서 소멸됐고 터키 리라는 2009년 0을 6개 지우는 리노미네이션을 실시해 한자릿수 환율이 됐다. 지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만 4자릿수 환율을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원화의 리노미네이션이 거론된 적도 있었으나 당시 경제에 미칠 부정적 요인, 특히 물가상승을 우려해 논의가 중단된 바 있다.


최근의 우리 경제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물가가 안정돼 있다. 지금이야말로 원화의 국제화 추진에 앞서 선행돼야 할 원화의 리노미네이션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기다. 1997년 미증유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쌓아온 정책적 경험을 잘 활용한다면 원화의 국제화 추진에 따른 어려움은 충분히 잘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