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러시아, 더 이상 위협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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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유럽을 규정하는 사건은 러시아의 크림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같은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유지할 형편이 아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10년에 걸친 꾸준한 유가 오름세가 러시아를 무모하게 만들었고, 군사적 능력을 펼칠 어떤 기회라도 잡으려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소련도 40년 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유가가 오르면서 수입이 높아지자 외교정책이 적극적이 됐고, 이는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이어졌다. 1973년 첫번째 석유금수 조처로 유가가 4배 폭등했고, 1970년대 막대한 매장량이 발견되면서 소련의 산유량은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1965~1980년 소련의 산유량은 20배 가까이 폭증했다.

급증하는 오일머니는 소련의 노쇠한 지도력에 불가침의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아프간 침공은 지역적 상황 전개(카불 내 반란)에 따른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었다. 이는 이 같은 흐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우크라이나 친유럽 성향 시위대에 대한 푸틴의 반응도 비슷한 양상을 거쳤다. 두 경우 모두 비용이 적게 들면서 전략적 이득은 큰 기회로 보였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다. 사실 소련의 아프간 모험의 처참한 결과는 지금 잘 알려져 있지만 침공 당시에는 서방의 주요 패배로 보였다.

1988년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는 파키스탄이 훈련시킨 무자헤딘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주도한 봉기에 따른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유가 하락이 의심할 바 없는 역할을 했다. 소련의 산유량 가치는 고점 대비 3분의 1로 추락했다.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고, 아프간에서 철군한 지 불과 3년 뒤에 소련이 해체되는 주된 요인이 됐다.

1990년대 러시아는 소련 해체에 따른 내부의 정치적 혼란에 사로잡혀 EU나 나토가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반기를 들 수조차 없었다. 러시아는 돈도 없었다. 유가는 계속 하락해 1999~2000년에는 배럴당 10달러까지 떨어졌고, 석유 생산도 줄었다.

러시아의 입장은 2000년대 초반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권이 점점 독재화하는 시기에 국제유가가 회복되고 러시아 산유량도 늘면서 러시아의 경제적 토대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때서야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에 나토가 동방으로 확대하지 않겠다는 묵계를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유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러시아 산유량 가치는 새로운 고점을 찍었고, 2008년에는 1990년대 수준의 10배에 이르게 됐다. 러시아는 같은 해 조지아를 침공했다. 2009년 대공황 기간 유가가 붕괴되기는 했지만 신속히 회복했고, 러시아 산유량 가치는 2012~2013년 또다시 최고를 기록했다. EU와 우크라이나의 통상협정에 대해 러시아의 태도가 강경해진 건 바로 그 시점이다. 러시아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EU와 우크라이나가 2년도 넘게 협정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EU는 크렘린의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반대에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 뒤 유가는 오랜 침체를 겪었다. 최근 유가가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떨어지면서 러시아의 산유량 가치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는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임을 시사한다.

유가만이 러시아의 문제는 아니다. 서방의 경제제재는 몇 달 전만 해도 아주 작은 구멍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루블 가치를 지난해 미국 달러 대비 절반 가까이 폭락하게 만드는 등 심각한 충격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는 여전히 취약하고, 러시아 지도부에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앞으로도 유럽에 도전할 것이다.
그러나 석유시장의 새로운 균형이 러시아의 경제적 토대를 흔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은 이번에 다른 방법으로 유럽을 구원한 셈이 됐다. 미국의 셰일 석유와 가스 생산이 나토 군을 유럽의 동쪽 국경으로 배치하는 것보다 러시아를 묶어두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전망이다.

대니얼 그로스 유럽정책연구원장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