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유럽 돈풀기, 저성장 탈출구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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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앙은행(ECB)이 마침내 양적완화(QE) 정책을 시작했다. 현 단계에서 주된 의문은 ECB가 이 같은 통화완화 추진에 긴요한 충분히 과감한 정책 수행의 자유를 독일로부터 얻어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QE가 장기 성장을 이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2008년 이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을 움켜쥐고 있는 지속적인 경기침체를 종식시키는 데는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QE가 실제로 효과를 낼지 계속 의심하고 있다. 최근 크루그먼이 지적했듯이 '물가하락(디플레이션) 소용돌이'가 대부분 세계 경제를 끌어내리고 있다. 유가하락이 탈출 불가능한 수요감소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도 같은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세계 성장률 전망을 몇 단계 낮췄다.

비관론자들은 세계 경제가 극복할 수 없는 총수요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 때문에 '만성적인 둔화(스태그네이션)'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통화정책은 '명목금리가 제로 이하 영역(ZLB)'에 갇혀 있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주장에 따르면 정책금리가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 소용돌이 탈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경제는 악명 높은 유동성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불충분한 수요가 자가발전해 물가를 더 떨어뜨리고 실질금리를 더 끌어올려 추가 수요감소를 부른다.

이 같은 직관적 논리는 2008년 이후 미국과 영국의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크루그먼은 일본이 1990년대 시작된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으로 쓰러질 첫번째 주요국이 될 것이라면서 이후 유럽연합(EU), 중국이,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프랑 급등과 물가하락이 겹친 스위스가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는 미국도 소용돌이에 거의 근접한 상태여서 케인스학파의 거듭된 추가 재정정책 주장을 낳고 있다. 비관론자들은 재정정책이 통화정책과 달리 ZLB 상황에서 효과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은 디플레이션 위험을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최근 전망이 빗나간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의 회복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미·영은 (재정)적자 감축 속에서도 성장률 상승과 실업률 하락을 이끌어냈다. 2008년 위기를 적절히 진단하지 않고서는 효율적인 치료법을 처방할 수 없다.

비관론자들은 케인스가 설명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 상실과 비슷한 투자의지 급감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아주 낮은 금리에서도 투자수요는 낮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따라서 총수요 역시 부족하다. 디플레이션은 상황을 악화시키며 대규모 재정적자만이 수요 갭을 메울 수 있다.

그러나 단기수요 관리에서는 재정정책이 취약한 정책수단이다. 역설적이게도 1998년 큰 파장을 부른 논문에서 크루그먼이 지적했듯 단기적인 감세와 소득이전은 다 쓰이지 않고 저축으로 남게 되고, 이는 공공부채 급증을 낳으며 장기적으로 재정수지와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길 뿐이다.

희소식은 ZLB에 근접했음에도 통화정책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금리 속에서도 QE는 주가 상승, 장기 금리 하락, 통화 평가절하, 신용경색 완화를 유도해냈다. 민간투자가 부족하다면 이는 정말 좋은 투자계획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는 정책 투명성과 보완적인 장기 투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공자금을 지렛대 삼아 대규모 민간투자 물꼬가 터지도록 하는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의 장기투자 계획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그리스 채무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 중동 혼란 등은 본질적으로 거시경제 문제가 아닌 지정학적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015년은 현명한 외교와 통화정책이 번영을 만들어내게 될 길이다. 이 두가지 재료를 잘 꾸려나간다면 광범위한 회복을 손에 쥘 수도 있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 소장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