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징비록, 류성룡의 눈물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2.23 16:57

수정 2015.02.23 16:57

명나라 장수 앞에 무릎 꿇어.. 역사의 교훈 잊으면 동네북

[곽인찬 칼럼] 징비록, 류성룡의 눈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이 온다는 소식에 서애 류성룡은 걱정부터 앞섰다. 진린은 성품이 사나웠다. 그의 군사들은 함부로 조선 수령에게 욕설을 퍼붓고 때렸다. 류성룡은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앞으로 벌어지는 해전에서 패전할지도 모른다"고 탄식했다. 진린과 의견이 맞서 지휘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들을 풀어 사슴·돼지·해산물을 잡아 성대한 잔칫상을 차렸다. 그러곤 멀리까지 나가 진린을 영접했다. 명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은 흠뻑 취해 이순신을 칭송했다. 그때 왜적이 가까운 섬을 침범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은 군사를 보내 보기좋게 적을 무찔렀다. 이때 이순신은 전투에서 벤 왜적의 머리 40수(首)를 진린에게 바치며 전과를 그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의 입은 귀에 걸렸다.

그 뒤 진린은 모든 일을 이순신과 상의해서 처리했다. 출타할 때는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고 다녔다. 감히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지 못했다. 진린이 선조에게 올린 글 중에는 "통제사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지략이 있으며 위태로운 국운을 일으킬 큰 공을 세울 것"이라고 칭찬하는 구절이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복했다는 증좌"라고 전한다.

나는 이순신이 원리원칙만 따지는 사람인 줄 알았다.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이끌고 온 명나라 장수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고집불통으로만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이순신을 잘 안다는 류성룡조차 이순신이 진린과 한판 붙을 걸로 예상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속 좁은 인물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제 고집쯤은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대인배였다. 나는 이순신이 진린을 위해 성대한 잔칫상을 차리는 모습에서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이순신의 소통 능력은 원균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이순신을 몰아낸 뒤 한산도에 부임한 원균은 가장 먼저 이순신의 심복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그런 다음 이순신이 거처하던 운주당(運籌堂)의 안팎을 울타리로 막아버렸다. 그러곤 첩과 함께 운주당에 살았다. 그 통에 장수들조차 원균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반면 이순신은 운주당으로 밤낮없이 장수들을 불러모아 왜적을 물리칠 방도를 찾았다. 지위가 낮은 군졸이라도 의견이 있으면 운주당에 들러 서슴없이 밝히도록 했다. '징비록'은 전한다. "이순신은 전쟁에 앞서 번번이 모든 부하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뒤 싸움에 임했으므로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서애는 지난 일을 경계하고(懲),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려(毖) '징비록'을 집필한다. 탈고는 1604년 곧 선조 37년에 이뤄졌다. 그러나 정작 '징비록'이 주목을 끈 곳은 바다 건너 일본이었다. 1695년 '징비록'은 일본에서 출간된다. 일본판 '징비록'은 서문에서 "조선인이 나약하여 빨리 패하고 기왓장과 흙이 무너지듯 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고 분석한다. 1712년(숙종 38년)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일행은 오사카의 거리에서 '징비록'이 팔리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징비록'을 업신여긴 후손들은 수백년 뒤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기고 만다.

'징비록'엔 부끄러운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왜적에 쫓겨 갑옷을 벗고 알몸으로 도망친 장수 이야기가 속출한다. 임금과 신하들은 백성을 버려둔 채 도성을 탈출할 방도를 찾느라 골몰한다. 명나라 총대장 이여송은 제때 군량을 보급하지 못했다며 류성룡과 호조판서 등을 꿇어앉힌 뒤 군율로 다스린다. 이때 류성룡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류성룡의 눈물은 조선의 눈물이다.

광복 70주년과 TV 드라마 방영을 계기로 '징비록'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동네북이 된다. 류성룡의 징비 정신은 오늘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죽비가 된다.
특히 지도자들에겐 필독서다. 조상 중에 류성룡과 이순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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