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fn논단]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독일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3.11 16:41

수정 2015.03.11 16:41

[fn논단]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독일

독일과 일본이 닮았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문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자행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성노예와 강제노역의 책임을 부인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반면에 독일은 지도자들이 나서서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고 피해국들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그만큼 역사적 무한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보상하여 화해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덕분이다.

그러나 이런 독일도 일본과 닮은 점이 있다. 1950년대 서독이 경제부흥에 성공한 것이 막대한 부채를 탕감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유로존 위기에서 그리스의 이런 요구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독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자국에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독일은 일본과 유사하다.

1953년 2~8월 영국 런던에서 서독의 외채 탕감을 논의한 국제회담이 열렸다. 1,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정부 등이 채권자로 참여했다. 1차 세계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이유조약으로 당시 독일은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때 갚지 못한 돈이 약 160억마르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서독은 경제회생을 위해 미국 기업 등으로부터 약 160억마르크의 외채를 조달했다. 320억마르크의 외채는 당시 경제발전을 시작한 서독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결국 6개월간의 협상 끝에 서독은 총 외채의 절반 넘게 탕감받아 외채가 150억마르크로 줄어들었고 상환기간도 30년 장기로 전환되었다. 이런 매우 파격적인 조건 덕분에 서독은 1950년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유로존 위기가 발발한 2010년부터 일부 학자들은 독일에 유럽판 마셜계획을 주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 경제위기에 처한 유로존 국가들의 위기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서유럽 경제지원 프로그램인 마셜플랜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였고 1950년대 이런 파격적인 외채 탕감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지원이 독일 경제 부흥의 종잣돈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학자들의 이런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난 1월 말 그리스의 집권 정당이 된 좌파연합 시리자도 독일에 부채 탕감을 요구했다. 채권자와 그리스가 참여하는 유럽 부채협상회의를 개최해 그리스 부채의 합리적인 조정을 논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 독일의 모든 지도자는 그리스의 이런 제안을 일축해 버렸다. 그리스의 부채는 지난해 말 국내총생산(GDP)의 약 174%이다. 이런 과중한 부채를 일부 탕감받지 않고서는 그리스의 경제회복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을 부지런한 개미, 그리스 등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의 시민들을 베짱이로 보는 독일의 시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의 시한을 6개월 연장받았기에 8월이면 또 만기가 된다. 오는 6~7월 유럽인들이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국제 자금시장은 다시 그리스 구제금융 연장 논란으로 진통을 겪을 게 뻔하다.
유럽연합(EU)의 최대 경제대국이자 유럽통합을 이끌고 있는 독일은 긴축 우선 정책을 계속해 고집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막강한 독일은 이를 일축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독일이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