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아람코와 정주영

"정주영 회장 기념관은 꼭 가보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정에 넣어주세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고위층은 올 초 한국 측 관계자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넉달 후 서울에서 열릴 이사회를 준비하던 아람코 측은 유일한 외부행사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기념관 방문을 강력히 원했던 것이다.

최근 예정대로 한국을 찾은 사우디 석유재벌과 관료들은 아람코가 대주주인 에쓰오일의 울산 공장을 둘러본 뒤 곧바로 인근 현대중공업 본사로 향했다. 아산기념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30분. 오찬 전까지 이곳을 둘러본 이들이 특히 발길을 떼지 못한 곳은 정주영이 생전 신고 다닌 낡은 구두가 전시된 코너였다고 한다.

이번 아람코 일행의 수장은 사우디 석유장관만 20년을 지낸 알 나이미 석유광물자원장관이었다. 올해로 여든살 고령의 장관은 현대의 중동 모래바람 신화를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는 청년시절 현대의 1976년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 주베일 항만 공사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현대의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는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역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대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수주액 9억5800만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25%에 해당되는 금액. 오일쇼크로 국가부도가 걱정됐던 한국 경제에 축복같은 사업이었다. 현지의 사우디 경제인들은 가난한 나라 한국의 저력,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한 기업가의 열정에 놀랐을 것이다.

가능하리라 누구도 믿지 않았던 주베일 항만 사업권을 현대가 따낸 것은 경쟁사보다 낮은 입찰 금액뿐 아니라 공사기간을 확 줄일 수 있다고 공언한 현대의 추진력이 더 주효했다.

정주영은 "사우디는 비가 오지 않으니 24시간 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근로자들도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막에서 땀 흘려 고향의 부모님, 누이, 아내에게 돈을 부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 벅찼던 사람들이 그곳에 우글했다. 12만t짜리 해상구조물을 실은 뗏목 같은 바지선이 울산 앞바다를 떠나 인도양을 건너 걸프만까지 가는 과정은 눈물나는 드라마였다. 정주영이 각본을 짜고 감독까지 맡은 20세기 최대 공사는 그렇게 완성됐다.

한국 경제에 이정표를 만든 인물, 정주영에 대한 관심은 사우디뿐 아니라 이제 국내에서도 불이 붙을 것 같다. 오는 11월 탄생 100주기를 맞아 재계 안팎에서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아버지 몰래 소를 팔아 챙긴 70원으로 가출한 17세 소년이 쌀집 배달원, 자동차 수리공 등을 거쳐 건설사 사장, 글로벌 기업가가 된 과정에 눈이 휘둥그레질 10대가 많을 것이다.
고향에 빚을 갚겠다며 소 500마리를 끌고 분단의 벽을 넘은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도 정주영이지 않은가.

한국 대기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창업 1세대를 지나 이들의 역경을 지켜보며 사업을 성장시킨 2세대와 그다지 어려움없이 선대 유산을 물려받은 3·4세대가 공존하는 과도기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 기업의 부흥을 바라는 많은 이들은 지금 이 3·4세의 행보와 처신에 특히 주목한다. 기업인의 길, 정주영의 100년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jins@fnnews.com 최진숙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