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제로금리와 국가부채

선진국들은 장기 제로금리 환경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미국, 영국, 일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중앙은행의 제로금리 정책이 이미 수년간 지속됐지만 일시적인 일탈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중장기 금리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 같은 상황은, 특히 유로존에서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엄격히 말하면 제로금리는 단지 위험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부 중기 채권의 명목금리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금리는 유로존 전반에 걸쳐 제로에 근접하고 있고―또 국채 상당분이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졌으며―한동안 낮은 상태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의 경우 만기 5년까지의 국채 수익률은 마이너스 상태가 되고, 만기 5년이 넘는 경우에도 제로 수준을 살짝 웃돌 것이어서 가중평균으로는 제로 상태가 된다. 일본의 제로금리 환경이 이제는 더 이상 특수 상황이 아니게 됐다.

물론 유럽중앙은행(ECB)의 대규모 채권매입 프로그램이 일시적으로 금리를 억누르는 것일 수 있고, 일단 내년에 매입이 중단되면 금리는 다시 오를 수 있다. 그렇지만 투자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독일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7%를 밑돈다. 이는 투자자들이 아주 긴 시간 초저금리를 예상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 현재의 초저금리로 묶인 장기 채권으로 만기 구조가 바뀌고 있다.

어떤 경우이건 유로존은 제로금리가 점점 더 장기로 고착되는 것 같다. 이게 투자자들과 채무자들에게는 실제 어떤 의미일까.

확실한 건 명목금리만이 아닌 실질(물가를 감안한) 금리 역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낮은―심지어 마이너스―명목금리는 물가가 충분히 떨어질 경우 예금주들에게는 플러스 실질금리가 될 수 있다. 일본 예금주들은 명목금리 제로인 상태에서 이 같은 현상 덕에 10년 넘게 혜택을 봤다. 미국보다 금리가 훨씬 낮았지만 더 큰 이득을 취했다.

그럼에도 명목금리는 역시 중요하다. 무시할 정도로 낮아지면 순익이 악화하고, 서서히 대차대조표 문제가 누적되기 때문이다.

대차대조표 회계는 기괴한 명목가치와 시장가치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불투명할 수 있고 조작도 쉽다. 물가가―따라서 평균 채무지급능력이―떨어지면 실질 채무부담은 높아진다. 그러나 이는 채무를 차환하거나 금리가 올랐을 때만 분명해진다.

제로금리 또는 이에 가까운 금리 환경에서는 채권자들은 '늘리고, 꾸미는' 유인을 갖게 된다. 즉 채권 만기를 연장해 문제가 더 오래 감춰지도록 하는 것이다. 채권을 매우 낮은 금리로 차환할 수 있기 때문에 만기 연장 위험은 아주 적고,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변제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채무자들은 훨씬 더 오래 연명할 수 있다. 결국 제로금리 상태로 영원히 만기연장이 가능하면 채무는 실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상환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채권은 일종의 만기 없는 영구채권이 된다.

일본의 사례는 이 같은 현상을 완벽히 보여준다. 국내총생산(GDP)의 200%가 넘는 일본 정부 부채는 의심할 바 없이 막대한 규모로 보인다. 그러나 채무비용은 고작 GDP의 1~2%에 불과해 변제 가능한 수준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현재 공공부채가 관리가능하다. 채무 규모는 GDP의 175% 정도이지만 초저금리와 긴 만기(일본 국채보다 길다) 덕에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금리가 충분히 낮다면 GDP 대비 부채비율이 어떻든 관리가능하다. 지금 같은 금리 환경에서는 공공부채 규모를 GDP의 60%로 제한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무의미하다.

제로금리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 쓰이는 '과도한 부채'라는 표현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이들 국가는 2008년 붕괴한 신용거품기에 막대한 빚을 졌지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채무비용은 충격―소득 감소, 성장 저해, 투자자들 간 불확실성 생성―을 주기에는 지나치게 낮다.
지금 이들은 그저 채무 만기를 더 길게 연장할 뿐이다.

국가 부채는 의심할 바 없이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제로금리 환경에서는 그 역할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대니얼 그로스 유럽정책연구원장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