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 58년을 걸어온 소리 인생 안숙선 명창

이세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6.22 18:22

수정 2015.06.22 22:08

득음했구나 싶었는데… 환상처럼 사라져 버리더라고 그렇게 평생 소리만 좇았어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박범준 기자


문화가 가지는 힘은 거대하다. 지난해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한류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무려 12조5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단지 돈 뿐이겠는가. 한국은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류가 세계의 중심으로 흐르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여기, 지난 수 십 년간 우리 문화예술의 물꼬를 트고, 세계로 이끌어간 거장들이 있다. 국내 영화,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문학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명장'을 선정, 예술과 함께 해온 그들의 인생과 한국 문화예술계의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생을 건 싸움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한번 빠지면 평생 허우적대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오히려 깊게, 더 깊게 파고들게 하는 세계다. 명창(名唱) 안숙선이 말하는 소리꾼의 인생은 그랬다. 화려한 예술인이 아닌 수행자의 고행길을 닮았다. 그는 그 길을 58년째 묵묵히 걷고 있다.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 소리 속 판이여."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소리꾼 유봉의 말처럼 그 세계에는 그들만이 느끼는 환희의 경지가 있는 걸까.

"아무것도 안하고 몇 년씩 수천번, 수만번 똑같은 소리만 반복해. 그렇게 조금씩 채우고 쌓다보면 어느 순간 소리집이 넘치고 공허한 것 없이 꽉 차는 지점에 도달해요. 그때 깨달음이 오죠. 그걸 득음이라고 해요. 그러다 또 환상처럼 사라져. 만든다고 다시 만들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어요. 그렇게 끝없이, 평생 쫓아가는거죠."

아홉살 소리를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기 명창'으로 불렸다. 1949년 '국악의 성지'로 불리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동편제의 거목인 강도근을 외당숙으로, 가야금 명인 강순영을 이모로 둔 국악 명가에서 자랐다.

―국악 신동이었나.

▲소질은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불려가서 노래를 했다. 소풍을 가면 무덤 위가 무대가 됐다. 동네 아이들과 놀 때도 창극을 하고 놀았다. 길가에 세워진 트럭 위에 올라가서 밤 늦게까지 공주님, 태자마마님을 찾으며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했다. 판소리의 발산지인 남원, 국악인 집안 환경의 영향도 크지 않았나 싶다.

―그 길이 싫었던 적은 없나.

▲먹고 살기도 힘든 1960년대 문화예술 환경은 열악했다. 포장(布帳)을 둘둘 말아서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장터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아무데나 쳐놓고 공연을 했다. 역할이라는 것도 없이 혼자 여러가지 목소리를 내야 했다. 소리가 싫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 의미를 찾지 못했다. 시집가면 그만 둬야지 했지, 이렇게 오래 소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 후 그는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말 그대로 '생계형 국악인'이 된 셈이다. 안 명창은 그때 '이게 내가 가야하는 길인가보다'하는 운명을 느꼈다고 했다.

―진짜 소리가 좋아진 건 언젠가.

▲막 서른살이 될 무렵인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오디션을 통과해 국내 첫 국악 전용관, 국립극장의 소속 단원이 된 거다. 그때부터 소리의 구조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국악계의 대스승들을 모시고 보니 소리라는게 각자의 가치관, 감정에 따라 모두 달라지는 거라는 걸 처음 깨닫게 됐다. 이거 다 배워야겠다,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 싶었다.

―득음은 언제 찾아왔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속과 겉이 있다. '이면(裏面)'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이면 모두를 소리로 들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아야 하고 그걸 소리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음을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 수천, 수만번의 반복 연습을 통해 어떤 예술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난 아직도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수천, 수만번 같은 길을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걸 반복한다. 하루라도 쉬면 매일 타던 말이 갑자기 안나가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자연스럽게 낚아채지도 못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최근 국악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길게는 8~9시간씩 이어지는 판소리 완창 형태를 벗어나 창극이나 다른 장르의 음악과 춤을 접목한 퓨전 국악으로 다양한 변신을 시도한다.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지만 우리 음악이 가진 묵직한 전통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득음'을 위해 한우물만 파온 소리꾼의 의견이 궁금했다.

―국악의 변신은 어떻게 보나.

▲좋은 시도다. 한 사람의 소리로만 푸는 판소리와는 달리, 창극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다 무대장치, 조명 같은 시각적인 재미를 살려 소리를 더 돋보이게 한다. 다양한 국악기도 등장해 종합예술로서의 국악을 만난다는 의미도 있다. 퓨전 국악도 마찬가지다. 우리 악기가 서양음악과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다. 굿거리, 진양조 장단도 서양음악과 만나면 색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그런 시도들이 국악의 저변을 넓혀주고 대중화, 세계화시킬 수 있는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보수적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국악은 사실 무대 위에 올려지던 공연이 아니라 우리 삶과 함께 숨쉬던,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이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성인이 될 때, 결혼할 때, 죽은 뒤 상여 앞에서도 우리 소리가 있었다. 현대에도 우리 생활 속으로 더 편안하고 깊이 스며드는게 국악이 더 빛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성이 훼손될 걱정은 없나.

▲중요한 건 국악이 주가 되고 다른 음악이 동화돼 와야 한다는거다. 그러기 위해선 국악에 대해서도, 다른 장르에 대해서도 깊이 알아야 한다. 철저한 노력과 공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 것을 잃게 된다. 국가적으로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과거와 반대로 국악인이 크게 늘고, 무대는 부족한 상황이다. 국악인으로 계속 살아갈 수 없어 다른 길로 빠지는 경우도 많다. 전통의 맥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더 다양한 길을 만들어주고 기회를 넓혀줘야 한다. 그동안 전통을 지키는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그걸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아홉살 소리꾼은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이 됐고 '보물'(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이 됐다. 58년의 시간동안 소리는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그 물음에 그는 소녀처럼 웃었다.

"젊을 땐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치중했지만 지금은 예쁜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도, 특별한 꼼수를 쓰지도 않는다. 그냥 인생사를 가감없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갈수록 아이처럼 순수하게, 덧씌운 것을 벗겨내고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고 싶다. 그런 날것의 소리가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되고 깊은 감동을 준다는 걸 이제 알았다.
"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던 길, 그가 나지막이 판소리 한자락을 흥얼거렸다. 곡명을 알 수도 없는 소리가 가슴을 쳤고, 그 울림에 먹먹해졌다.
찰나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소리의 세계를 조금 엿본 듯도 했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안숙선 명창 프로필 △1949년생(66세) △전북 남원 △아홉살 때부터 주광덕, 강도근, 강순영 등에게 소리의 기초를 배움 △박귀희(가야금 병창), 김소희(흥보가·춘향가), 박봉순(적벽가), 정광수(수궁가), 성우향(심청가) 사사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1987년 KBS 국악대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 △1997~2001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1998년 프랑스 문화부 예술문화훈장 △1998년 용인대 국악과 대우교수 △1999년 서울시문화상·옥관문화훈장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현) △2004~2009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2013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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