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메르스 역적이 박원순이라고?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사실상 진정국면을 맞았으나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방역당국의 행태를 보면 이 같은 사태가 또 오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최대 피해를 본 정치인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메르스 공포로 움츠러든 시민, 상인 등 모든 사회구성원이 큰 피해자임은 물론이다.

메르스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강남구보건소 직원을 만났다. 그는 2차 진원지나 다름없었던 이 지역을 관리하느라 여간 고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박 시장은 지난달 4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메르스는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전제했다. 전염 확산의 우려가 크다는 점도 강조했다. 허술한 방역당국 대책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메르스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한 것이다. 그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현명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이후 청와대와 중앙정부는 부랴부랴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정치인 박원순의 판단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브리핑이 있던 바로 그날 필자는 공교롭게도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샤워도 하고 저녁상도 물렸겠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 난데없이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밤 10시30분에 긴급 브리핑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처음에는 예사로 느꼈고 "이 늦은 밤에 무슨 브리핑이라고…"라며 혼잣말도 했다. 그러다 문득 '박 시장이 긴급브리핑을 한다고…. 이 야밤에, 대권선언이라도 하려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시청으로 향했다. 브리핑룸에 도착하자 카메라, 각 언론사 출입기자로 장사진을 이뤘다. 심지어 외신기자까지 북적였다. 정부가 무서운 전염병 메르스를 수수방관하기 때문에 서울시가 나서서 방역하겠다는 박 시장의 '6·4 야간 긴급선언'이었던 것이다.

내용은 메르스 35번 환자가 최일류병원인 삼성서울병원 의사로, 이 의사환자는 거리낌 없이 다중집객장소, 대중음식점 등지를 활보했다는 것이었다. 최고 병원과 중앙정부의 방역체계가 허술해 시민, 국민의 안전을 담보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튿날 박 시장을 바라보는 대부분 언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서울시 대변인을 통해 전해도 될 내용을 그 야밤에 무슨 호들갑이야'부터 '야당은 역시 포퓰리즘뿐이야, 공포감을 조장시켜 반사이익을 노리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박 시장에게 쏟아졌다. 여기에다 청와대와 중앙정부까지 나서 박 시장 비판에 가세했다.

마침 서울로 향했던 해외 관광객은 줄취소 사태가 벌어졌고 명동, 코엑스 등 서울의 대표적 상권은 매출이 확 줄었다. 명동·강남 등지의 해외 관광객은 온데간데없어졌다는 등의 보도가 연이어 나왔다. 눈을 떠보니 그는 하루 아침에 '메르스 역적'이 돼있었다.

학창시절 이런 표어를 참 많이 봤다.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의 무리를 막아내기 위한 '총력안보', 식량이 부족하던 그 시절 쌀 한 톨이라도 더 증산하기 위한 '소주밀식',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안전제일' 등이다.
예나 지금이나 안전에 대한 강조는 하면 할수록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요즘 방역대책은 그 시절보다 못하다는 지적이 국민들에게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메르스가 그랬고, 잊을 만하면 신종 전염병이 나돌고, 연례행사처럼 치르고 있는 조류독감·구제역 파동 등은 국민에게 큰 피해를 준다. 따라서 박 시장의 당시 위험경고가 야밤에 이뤄졌든 낮에 이뤄졌든 제대로 된 방역을 통해 위험을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는 훼손되지 않는 만큼 박 시장에 대한 지탄은 철저한 방역체계 구축을 통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일로 승화시켜야 한다.

dikim@fnnews.com 김두일 사회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