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친박·비박 싸움 지겹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7.06 16:55

수정 2015.07.06 16:55

나라 망친 당쟁을 보는 듯 누가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
[곽인찬 칼럼] 친박·비박 싸움 지겹다


나이 먹을수록 윗사람한테 대드는 게 어렵다는 걸 실감한다. 특히 집사람을 향한 '지적질'은 99% 지는 게임이다. 중년 남자들은 누구나 수긍할 거라 믿는다. 그러니 대통령과 맞서는 게 얼마나 힘들겠는가. "임금이 일으키는 공포는 사자의 으르렁거림 같아 그의 노여움을 사는 자는 목숨을 잃는다"고 했다(잠언 20장 2절).

종종 이런 충고를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중국 당(唐)나라 태종 때 위징(魏徵)이란 신하가 그랬다. 위징은 태종이 자색이 뛰어난 여인을 후궁으로 앉히려 하자 제동을 걸었다.
그녀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태종은 위징의 말을 따랐다. 태종과 신하들의 대화를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얘기다. 태종은 드물게 통이 큰 임금이었다. 그는 위징이 죽자 다른 신하들에게 "예전의 위징처럼 나에게 옳고 그름이 있으면 직언하고 은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렇다고 군주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진 마라. 태종 같은 임금은 천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도 용감했다. 그는 지난 4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공언한 대로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진영의 창조적 파괴'를 꿈꿨다. 다른 말로 하면 합의의 정치다.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그의 연설은 새누리당판 제3의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랴, 그는 역린을 건드렸다. 대통령은 오른쪽으로 가려는데 유승민은 자꾸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권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제치고 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새가 됐다. 어느 대통령이 이를 좋아하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당 태종이 아니다. 태종은 종신직 임금(23년 재임)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짧다. 그것도 벌써 반이 흘렀다. 본때를 보이겠다며 회초리를 든 것은 당연하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조선 선조 때 사림(士林) 세력은 동인·서인으로 갈렸다.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나뉘었다. 이어 북인은 대북·소북으로 쪼개졌다. "당쟁은 전쟁(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한층 심한 대립과 갈등을 빚어 놓는, 실로 비정상적 통치체제의 한계를 드러냈다"(진덕규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전란 후 대북은 선조의 후계자로 광해군을 밀었다. 소북은 영창대군 편을 들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했다. 권세를 누리던 대북은 인조반정과 함께 몰락했다.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갔다. 서인은 대북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과 손을 잡았다.

오늘날 새누리당은 친박·비박으로 갈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비노가 대립한다. 비박은 되레 비노와 친하다. 유승민의 최대 지원군은 다름 아닌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인내와 관용을 당부하고 싶다. 당장은 속이 상하겠지만 길게 보면 유승민을 놓아주는 게 유승민을 이기는 길이다. 나아가 이종걸까지 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태평양 건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보라. 작년 11월 중간선거가 끝나자 사람들은 오바마를 레임덕 취급했다. 야당인 공화당이 상·하원을 동시에 장악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오바마의 '매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쿠바와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했고, 이란과의 핵협상 타결도 코앞이다. 친정인 민주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반대하자 서슴없이 공화당의 손을 잡았다. 빈틈없는 오바마·공화당 연합작전 덕에 TPP 협상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중국 춘추시대 오·월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였다. 하필 두 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강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게 생겼다. 두 사람은 힘을 모아 배를 바로잡았다. '손자'에 나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다. 큰일을 이루려면 때론 원수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 같은 편은 말할 것도 없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조선시대 당쟁사(史)를 되짚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당쟁은 끝내 망국으로 이어졌다.
박근혜·유승민 싸움은 누가 이겨도 지는 게임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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