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사설]

국민연금, 투기자본 편에 서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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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사태 때 백기사 역할.. 삼성, 확 달라진 모습 보여야
국민연금은 어느 쪽에 표를 던져야 하나. 삼성인가 엘리엇인가. 오는 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를 앞두고 국민연금 의결권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를 가진 2대 주주다. 삼성과 엘리엇의 지분은 주총을 제 뜻대로 끌고 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결정권은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

국민연금은 딜레마에 빠졌다. 엘리엇 편에 서면 투기자본에 휘둘렸다는 비판을 각오해야 한다. 삼성 손을 들어주면 대기업에 굴복했다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최근 사례를 보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반대표를 던질 공산이 커보인다. 세계 1·2위 의결권 자문사들이 반대를 권했고, 국내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같은 견해를 밝혔다. 국민연금은 더 이상 예전의 거수기가 아니다. 실제로 지난달엔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SK와 SK C&C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졌다. 앞서 3월에도 기아차 주총에서 이사들이 경영진 감시·감독 업무를 소홀히 했다며 사외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점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투기자본이 개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SK그룹은 소버린의 파상 공세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계열사인 SK글로벌의 분식회계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소버린은 그 틈을 파고 들었다. 이때 백기사로 나선 게 바로 국민연금이다. 당시 SK㈜ 지분 3.6%를 가진 국민연금은 주총 당일 SK 지지를 공식 발표했다. 이는 최 회장 측이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찬반 기준을 주로 주주가치 훼손 여부에 둔다. 온 국민의 쌈짓돈을 모아 운용하는 기금이 수익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투기자본이 끼어들면 더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1700억원을 투자한 소버린은 2년여 만에 1조원 가까운 수익을 챙겨 떠났다. 국민연금은 온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돈이다. 길게 보면 우리 대기업들이 잘 돼야 연금 수익률도 높아진다. 국민연금이 약탈적 헤지펀드의 장단에 놀아나선 안 된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어떤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든 헤지펀드들이 노리는 것은 돈이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든 그들에겐 알 바 아니다.


이미 소버린 선례가 있다. 국민연금이 우리 기업 편에 선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삼성은 먼저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들과 소통하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국민연금도 떳떳하게 합병 찬성 의결권을 행사할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