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중후장대 산업의 위기

한동안 정유업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최악'이었다. 글로벌 경기침체, 수요부진, 여기에다 셰일가스업체와 중동 산유국의 기싸움까지 맞물려 추락한 국제유가는 정유사 실적을 최악으로 끌어내렸다. 37년 만의 적자, 창립 이후 사상 첫 적자 같은 문구를 지난해 하반기 수도 없이 기사에 썼다. 배럴당 50∼60달러대 저유가가 지속된 올 상반기엔 정제마진이 올라 깜짝 반등했다. 하지만 배럴당 40달러 선도 힘겨워 보이는 지금 유가 상태를 보면 하반기 다시 통곡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 수년 동안 조선업계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말로는 '내년 하반기'가 꼽힌다. 각종 기관들은 수년 동안 이 업종의 형편이 나아지는 시점을 '내년 하반기'로 전망했다. 선박 교체수요와 맞물려 내년 하반기엔 좀 괜찮을 것이라는 분석이 수년째 반복됐다. 조선업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가 엄친아 이름도 아니고,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난 7월 조선업 곳곳에서 해양플랜트 악재가 터지면서 이 엄친아 이름도 쏙 들어갔다. 이제 조선업계에서 가장 흔한 단어는 '조단위 손실'이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빅3'의 올해 예상 적자규모는 6조원대에 이른다.

철강업계에선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중국 쇼크'다. 중국발 쇼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긴 하지만, 철강업계가 겪는 중국 쇼크는 강도나 누적 시기 등을 따져볼 때 상대적으로 무척 심각해 보인다. 국내 철강재 시장에서 중국산 공습은 이제 품목을 가리지 않는 상황이 됐다. 난이도 높은 고급강도 안정권이 아니다. 국내에 수입된 냉연제품, 아연도금 중 중국산은 각각 70%, 80%를 넘는다.

지난 25일 한국철강협회가 주최한 철강산업발전포럼에 참석한 중국 철강산업 관계자는 "중국산 비중이 한국에서 커지는 것은 그만큼 중국 제품이 쓸만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는 "한국 철강제품은 중국이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워져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 철강산업이 다 좋아질 것"이라는 충고까지 보탰다. 국내 관계자들은 그의 이런 말에 불편함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산이 저가를 미끼로 국내에서 급속히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 당국이 모를 리 없지 않겠느냐는 측면에서였다.

한때 한국 경제 기적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철강·조선·정유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 이제 시름시름 앓는 수준에 이르렀다. 생존을, 미래를, 업의 본질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이 위기의 일차 책임은 물론 미리 대비하지 못한 업체에 있을 것이다. 왜 거스를 수 없는 세계 흐름을 더 빠른 속도로 쫓아오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의 모습이 최선이었나. 하지만 이 위기의 배후엔 또 공통적으로 중국이 있고, 그 옆에 안일한 판단을 한 한국 정부도 있다. 현장에선 "특혜는 바라지도 않는다. 공정하게만 경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들린다.
중국의 편법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과 우리 내수 시장에서 싸우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일자리 창출이 국가 과제가 되고 있는 요즘 중후장대 산업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한 산업의 평가기준에 고용력은 지금보다 더 많이 배려돼야 하지 않을까. 한국 산업의 근간이 튼튼해질 수 있길 응원해본다.

jins@fnnews.com 최진숙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