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서 있을 의무' vs. '앉을 권리'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명절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기업 현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은 당시 38년 만에 한 달여 일찍 찾아온 명절 때문에 주문량과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매우 분주했다. 공장 내부는 제품을 담았던 골판지 상자가 뜯겨 나가는 가운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직원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컨베이어벨트당 10여명이 일렬로 서서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선물세트 포장을 완성하고 있었다.

윙윙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소리와 바쁜 손길로 가득한 현장 한쪽에는 빽빽한 근무시간표가 걸려 있었다. 아침 출근부터 늦은 오후 퇴근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한 휴식시간은 10여분간 단 한두 차례에 불과했다. 공장 관계자는 인근 도시까지 버스를 보내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여름휴가는 꿈도 못 꾼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컨베이어벨트 앞 근로자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매년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이면 유통업계는 이런 과정을 거쳐 명절 선물세트를 시중에 선보이고 있다. 업체들은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TV 광고는 물론 다양한 마케팅을 펼친다. 그 이면에는 하루 종일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서 선물세트 상자를 채우느라 총 10시간 넘게 일하는 동안 앉을 시간조차 제한받는 근로자들이 있다.

이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도 마찬가지다. 고객서비스를 이유로 10시간 가까이 서 있는 직원이 대부분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앉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문구를 명시, 사업주의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권장할 뿐이다.

일부 근로자들은 정해진 휴식시간 탓에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리거나 너무 오래 서있어야 하는 근로환경 때문에 하지정맥류로 수술을 받기도 한다. 근로자의 '앉을 권리'에 대해서는 최근 몇 년간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지만 사업주들의 인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이는 사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앉아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일부 몰지각한 고객들의 아니꼬운 시선도 문제다.
고객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는 최고의 근로환경에서 비롯된다. 양질의 고객 서비스와 좋은 품질의 제품 생산을 위해서는 근로자를 배려하는 근로환경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인식 확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 있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앉을 수 있는 권리'도 근로자에겐 필수다.

gloriakim@fnnews.com 김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