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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6) 연극배우 박정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0.18 16:53

수정 2015.10.18 21:16

"내 첫 배역은 시녀.. 자존심 상했지만 정신 번쩍 들더라고"
"숙명처럼 이끌렸지"
아홉살 때 본 연극 '원술랑'에 매료됐어. 그렇다고 배우가 되겠다고 꿈 꾼 건 아니었어. 대학도 신문학과로 들어갔지. 대학연극은 시시해보였거든. 그런데 숙명처럼 무대로 이끌렸던거야. 첫 오디션을 본 '페드라'에서 여왕역을 맡을 줄 알았다니까, 자신만만했던거지.
"뜨끈뜨끈한 열정 가져야"
연극한지 53년이 됐지만 아직도 관객들의 진심어린 박수소리가 가장 뿌듯한 순간이야. 연극 배고픈 직업이라지만 연극만 배고프나. 우리는 사람들 감동시키는 직업, 항상 열정 가져야 가능해. 안 그러면 금방 거짓이 들통나버려. 그냥 이대로 배우로 죽고싶어.
'한국 연극계의 대모'라는 평가을 얻고 있는 연극배우 박정자는 "연극배우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선 언제나 뜨끈뜨끈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한국 연극계의 대모'라는 평가을 얻고 있는 연극배우 박정자는 "연극배우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선 언제나 뜨끈뜨끈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대학교 2학년 때 연극부 오디션을 보고 처음 맡은 역할은 시녀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여덟 살 때부터 극단 신협의 '햄릿' '오셀로' '세일즈맨의 죽음' 등을 보며 이미 고전을 섭렵했다. 대학에 입학하고서 '시시한 대학 연극 따위' 눈에 차지도 않았지만 1년 내내 몸이 근질거렸다.
본능에 이끌려 온 오디션. 당연히 왕비 페드라 역을 따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녀 파노프라니…. 대사는 고작 열여섯 마디. '한국 연극계의 대모'로 불리는 배우 박정자(73)의 데뷔 무대는 초라했다. "연극을 우습게 봤지. 실제 무대에 서본 적도 없는 주제에 보는 눈만 높았으니까. 선배들이 보기에 연기가 말이 아니었을 텐데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언젠가 저 왕비 역을 꼭 맡고 말겠다 다짐했지."

37년이 흐른 1999년. 극단 자유의 '페드라' 공연에서 박정자는 그 다짐을 실현시켰다. 그 사이 그는 한국의 연극판을 주름잡는 큰 배우가 돼있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지금까지 140편이 넘는 연극과 10편 이상의 영화로 한 해도 빠짐없이 관객과 만났다. 버티기조차 힘겨운 배고픈 연극판에서 이름을 날리며 걸어온 연기 인생 53년. '대모'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지난 9일 서울 명동 예술극장에서 연극 '키 큰 세 여자'의 공연이 끝난 뒤 만난 박정자는 그러나 '대모'가 싫다고 했다. "그런 부담스러운 타이틀이 싫어. 내가 누구의 '큰엄마'인가요. 내 길을 가는 거지. 그냥 연극배우 박정자."

어릴 때부터 연극배우의 꿈을 키웠던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연극이 그에게 들어왔다. 아홉 살이던 박정자는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극단 신협 연구생이던 오빠 박상호가 출연하던 연극 '원술랑'을 처음 보고 연극에 매료됐다.

―6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가 또렷이 기억 나나.

▲1950년 4월, 6·25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연극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됐고 이후에 나는 오라버니의 친구인 김기영 감독의 영화 '육체의 약속'(1975년)에 출연해 대종상 여우조연상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내 연기인생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학창시절 내내 연극을 했나.

▲초등학교 땐 교회나 학교에서 가끔 무대에 오른 적은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한국무용과 노래를 했다. 연극반은 없어서 연극 무대에 오를 기회는 없었다. 다만 연극을 많이 봤다. 피란 다니던 중에도 신협이 연극을 한다고 하면 꼭 가서 챙겨봤다. 무대가 좋은데 이유가 없었다.

―대학을 연극영화과가 아니라 신문학과에 진학했다.

▲왠지 연영과는 가기 싫었다. 별 볼일 없어 보였다. 배우가 돼야겠다는 확고한 꿈도 없었다. 그저 마음 속에 무대를 향한 동경, 열망이 있었다.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결국 문리대 연극부 오디션을 보게 됐다.

―그 오디션을 보고 '페드라'로 데뷔했다. 첫 무대의 기억은 어땠나.

▲시녀 역할을 맡았을 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주제 파악을 했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무대를 완전히 즐겼다. 그리고 언젠가 이 작품의 주인공을 꼭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대학 연극이 너무 유치할 것 같은 거예요. 이미 나는 보는 걸로 치면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거지. 아니나 다를까 학예회 수준이더라고. 그래서 1학년 땐 오디션 볼 생각도 안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2학년 때 내 발로 찾아갔지. 숙명 같았어."

그렇다면 대학 무대 말고 프로 무대에 처음 선 것은 언제냐고 물으니 따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프로다 아마추어다 그런 개념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다 보니까 프로가 된 거지. 내 스무 살 때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군."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대학극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대학극이 기성 연극을 위협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유명 연출가를 모셔왔고 대학 강당이 아닌 남산 드라마센터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

박정자 하면 특유의 깊고 흡인력 있는 음색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사람이 극을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에서 그의 음색은 빛을 발한다. '위기의 여자' '11월의 왈츠' '그 여자, 억척어멈' '영영이별 영 이별' 등을 통해 '모노드라마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성우를 계속했다면 대한민국 연극계의 큰 손실이었겠죠. 하하. 나는 어떤 목소리든지 다 낼 수 있어요. 캐릭터가 달라지는데 맨날 똑같이 '도도도도도'하면 되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넘나들어야지."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박정자는 1963년 동아방송국 개국 때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성우 시험에 합격했다. 학교와 방송국에서 모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박정자는 결국 대학 3학년을 중퇴했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6) 연극배우 박정자


―성우는 왜 하게 됐나. 학교를 그만두기 아쉽지 않았나.

▲당시는 라디오 전성시대였다. 성우도 일종의 연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걸 통해 빨리 내 길을 찾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대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2004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화여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교 동기들이 그래요. 박정자는 복도 많다고. 하고싶은 대로 다 하고 졸업장도 땄으니까. 연극만 좇았더니 이런 감사한 일이 생겼어요. 한 우물 파는 게 참 중요해요. 흔들리지 말고 갈 길을 가는거지."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

▲내가 하는 걸 그저 지켜봐 주셨다. 먹고살기 힘든 때였다. 나는 5남매 중 막내였고 등록금 마련하기도 벅찼다.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다. 물론 딸에 대한 믿음이 기본전제였다.

―그렇다면 더욱 돈 잘버는 직업을 택하고 싶지 않았나.

▲물론 연극은 돈이 절대 안된다. 그런데 돈 벌려고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지금은 살만하시냐 물으니 단칼에 돌아온 대답이 "아니"였다. "두 끼 먹고 살만하지. 세 끼까지는 벅차고. 하하. 배가 부르면 연기가 안돼요. 배에 기름이 끼면 영혼에도 기름이 끼거든.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것은 무대. 이 길이니까."

박정자는 농담조로 "내 사주팔자에 돈이 없대요"라면서 순간 연극 '키 큰 세 여자'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로 변했다. "나는 키가 작고 내 남편은 애꾸눈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극중 대사의 변용이었다. 그의 극중 남편은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애꾸눈의 부자였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대사를 외웠어. 그간 많은 작품을 했지만 이렇게 어려운 작품은 손에 꼽아요. 연출자를 포함해 모든 배우가 죽어났어."

그가 맡은 역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90대 노인. 맥락도 없는 대사가 길기는 엄청 길었다. 1막은 리얼리즘, 2막은 표현주의로 연기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야 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돌려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의 한마디가 마음을 돌렸다. "'어머니는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러는데 아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서는 안되겠다 싶더라고."

이번 작품은 특별히 연습하는 한달 반 동안 일절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운전도 안하고 인터뷰도 피했다. 에너지를 빼앗길까봐서다. 지난 5일 아들 내외가 공연을 보러 왔다. 그날은 아들의 생일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기립박수가 나왔다. 박정자는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 이 무대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

▲첫 손가락에 꼽는 건 '19 그리고 80'. 내가 선택해서 기획한 작품이다.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80세까지 하겠다고 공언했다. 지금 공연 중인 '키 큰 세 여자'도 박정자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말을 많은 분들이 한다. 어렵게 해낸 만큼 보람이 크다.

'19 그리고 80'은 19세 소년 해롤드와 80세 할머니 모드의 순수한 우정과 사랑을 그린다. 지난해 원제 '해롤드 앤 모드'로 6번째 무대를 열었다. 배우 강하늘이 상대역으로 출연해 전회차 전석 매진, 연장 공연까지 매진을 기록했다. "나는 내가 못할 역은 없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해보고싶은 거 다 해봤고 앞으로도 어떤 작품이 오든 기꺼이 다 할 수 있어. 항상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얘기예요."

―배우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당연한 걸 묻나. 공연 좋았다는 말 들을 때다. 그리고 관객들의 진심어린 박수를 받을 때. 형식적으로 치는 박수인지 아닌지 다 보인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고 있다.

▲여기저기 이름이 올라 있다. 근데 그건 다 나중이다. 연극배우 박정자가 먼저다. 사실 그런데 불려다니는 거 제일 싫다. 행정적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어서다. 나는 내가 앉을 자리를 구별할 줄 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연극계의 '어른'으로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는다. "사회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분야의 '어른'이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야. 조심스럽기도 하고."

―최근 연극계에 잡음이 많다. 서울연극제 파행에 이어 검열이 부활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잘 모르는 일이라 할 말이 없다. 답답하긴 하다. 서로의 입장이 너무 다른 것 같다. 중요한 건 연극하는 사람들은 연극을 하면 되는 거다. 그 정신을 잃지 않으면 된다.

―연극하는 후배들한테 한마디 해준다면.

▲열심히 해서 살아 남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연극인이 배고프다지만 연극인만 배고픈 것도 아니다. 자부심과 용기를 가져라.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다. 항상 뜨끈뜨끈한 열정을 지녀야 가능하다. 안 그러면 금방 거짓이 들통난다.


박정자는 "배우로 죽고 싶다"고 했다. 흔하디 흔한 배우들의 고백이 박정자의 입을 통해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팔순을 바라보는 배우의 꿈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었다.

"에이, 꿈 같은 소리 하네. 난 원래 꿈이 없어. 그냥 내 길을 열심히 걸어온 거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날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한 것."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 연극배우 박정자 프로필

△73세 △서울 출생 △진명여중·고 졸업 △1961년 이화여대 신문학과 입학, 1963년 중퇴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영화 '육체의 약속' 제14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조연상 △영화 '자녀목' 제23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조연상 △이해랑 연극상 △문화비전 2000위원회 위원 △서울시 문화상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 △이화여대 명예졸업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현) △의정부예술의전당·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 △보관문화훈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나눔추진단 단장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위원 △제4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특별상 △제3대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학장(현)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예술의전당 이사(현) △제4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연극예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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