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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입니다] (13) 신입사원 "상사 눈치에, 야근은 밥먹듯.. 뻔한 건배사에 구박도 받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0.26 17:13

수정 2015.10.26 21:48

(13) 신입사원
팀배치 받자마자 실전투입 선배들 뒤치다꺼리에 본인 업무 처리 버거워
군대식 '다나까' 문화 여전 치마 길이 등 제약도 많아
[나는 대한민국 ○○○입니다] (13) 신입사원 "상사 눈치에, 야근은 밥먹듯.. 뻔한 건배사에 구박도 받죠"


"아무것도 모를 때가 제일 행복한 거야. 취업 못한 애들이 얼마나 많아. 감사해하면서 다녀야지."

신입사원의 고충에 대해 묻자 3, 4년차 직장인들이 들려준 대답이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은 신입 때가 직장생활에서 가장 편했다고 다들 이구동성이다.

심각한 취업난에 취업 재수, 삼수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바늘구멍 같은 경쟁률을 뚫고 일할 기회를 얻은 신입사원들.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기자가 만난 신입사원(가명으로 처리했음)들은 저마다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신입사원은 책임이 없다고?

"입사하기 전만 해도 신입사원은 훈련병이라고 생각했어요. 6개월에서 1년은 배우는 기간이라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막상 들어와보니 신입이든 아니든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난 3월부터 대기업 인사팀에서 일을 시작한 이진수씨(29)의 대답이다. 이씨는 잡무부터 처리하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팀에 배치받자마자 실제적인 업무에 투입됐다.
오랜만에 보는 신입사원이라 팀 선배들은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업무를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지난 4월부터 대기업 해외영업팀에서 일하고 있는 민지훈씨(25)도 신입사원인 자신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선배들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신입사원이 잡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잡일뿐 아니라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많이 시킵니다. 책임을 제게 미루려는 거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다 제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어요." 민씨는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기도 버거운데 다른 선배의 일까지 떠맡아 곤란해질 때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지난 3월 대기업 법무팀에 배치 받은 이기훈씨(29)도 민씨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씨는 곧 해결 방법을 찾았다. "처음엔 제 일이 아니어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신입의 마음이었죠. 그러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뭔지 알겠더라구요. 이제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만큼 일이 줄어들었죠."

■저녁이 없는 삶…각오는 했지만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다. 도시를 수놓은 불빛들, 야근의 결과물이다.

야근공화국 대한민국. 신입사원들도 이런 문화를 몰랐던 건 아니다. 높은 취업의 문턱 앞에서 잠시 미뤄두었던 입사 이후 삶은 이제 그들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막 입사 2년차로 넘어가는 김호영씨(28). 평일 저녁은 항상 회사에서 해결한다. "업무가 많다 보니 준비시간과 점심시간을 빼면 평균 10~13시간 일을 합니다. 밤 10시를 넘기는 날이 다반사입니다. 회사원이라는 정체성만 남고 다 사라진 기분이에요."

김씨는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된다는 공기업 취업을 준비했지만 당장 급한 마음에 자신을 붙여준 대기업에 들어갔다. 김씨는 다시 공기업 입사 준비를 시작할 계획이다.

하지만 공기업에 간다고 모두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건 아니다. 작년 가을부터 한 지방 공기업 인사팀에서 일을 시작한 한준희씨(29)는 '저녁이 없는' 공기업도 많다고 말한다.

"공기업에 처음 들어갈 때는 시간이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만해도 야근을 수시로 하고 주말에도 출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대정부 업무를 담당하는 한씨는 퇴근 무렵 정부 부처나 국회의원실에서 자료를 넘겨달라고 하면 꼼짝없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지난 국정감사 기간에는 자정이 다 돼서야 퇴근하기도 했다.

■업무의 연장 '회식'…장소 물색부터 '센스있는 건배사'까지

저녁이 없는 삶의 주범 중 하나는 바로 회식이다. 사무실 공간이 음식점과 술집으로 바뀌었을 뿐 신입사원의 역할은 다르지 않다. 새벽까지 남아 선배들을 보필하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회식 날이면 퇴근 전부터 정신이 없습니다. 인원 수에 맞춰 적당한 회식장소를 섭외하고 회식 자리에선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해야 하죠." 주 2, 3회 정도 팀 회식에 참석한다는 이기훈씨는 한 번 회식을 하면 3·4차는 기본이고 새벽 2, 3시가 돼야 집에 갈 수 있다.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느냐고요? 팀장은 사무실에서 가장 자유롭잖아요. 일찍 출근해서 본인 자리에 앉아 잠깐 눈을 붙입니다. 신입은 물론이고 일반 사원들은 꿈도 못 꾸죠. 그래서 화장실 변기통에 쭈그려 앉아 선잠을 잡니다. 그 시간에 화장실에 가면 30분 동안 빈 자리가 안날 정도예요."

술을 한 잔 들이켤 때마다 외쳐야 하는 건배사도 신입사원들에게는 스트레스다. 뻔한 건배사를 하면 회식 분위기를 망친다고 구박받기 십상이다. "입사하기 전만 해도 전혀 접하지 못했던 문화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할까요? 항상 참신한 건배사를 준비하기 위해 검색을 했어요. 괜찮은 멘트가 있으면 동기 채팅방에 서로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이씨는 포털 검색 창에 '건배사'를 쓰면 맨 위에 뜨는 연관 검색어가 '센스있는 건배사'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다나까'…여전한 군대문화도

군대문화도 신입사원들이 경험하는 장벽 중 하나다. 제약회사 영업직으로 1년간 일했던 진수영씨(26)는 입에 붙지 않는 '다나까' 때문에 수시로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군대식 문화가 뿌리 깊이 녹아 있는 회사였어요. 여자들은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다나까'말투가 익숙지 않아 실수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버릇 없다고 엄청 혼이 났습니다."

복장도 제약이 많았다. "짧은 치마를 입지 못했어요. 항상 무릎 조금 아래로 내려오는 정도로만 입었습니다. 화장을 살짝 진하게 해도 멋 부리러 왔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고요. 다른 팀의 경우 심지어 치마를 못 입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씨는 여자가 적은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주로 이 같은 고충을 토로했다고 덧붙였다. 군대문화에 질린 진씨는 지난여름 사표를 냈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모든 신입사원들은 대화 내내 조심스러워 했다. 취업난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배부른 소리'로 비쳐질까봐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사원들이 인터뷰를 받아들인 이유는 이렇다.

"취업에만 매달리다 보면 입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입사 이후의 삶을 위해 고생고생해서 취업을 하려는 건데 말이죠. 이 인터뷰를 통해 많은 구직자들이 입사 이후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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