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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만 야구선임기자의 핀치히터] 야구선수 몸값 어디까지 치솟나

성일만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02 17:57

수정 2015.12.02 18:22

박석민 4년 96억원에 사인 
실제 100억 이상 가능성도
FA시장 과열 논란 커져
박석민
박석민

정우람
정우람


조 디마지오는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했다. 1949년 디마지오는 뉴욕 양키스와 연봉 10만달러에 계약했다. 메이저리그 최초 연봉 10만 달러 선수의 탄생이었다. 2년 전 행크 그린버그가 연봉 8만5000달러에 계약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어?'였다. 조 디마지오는 1954년 '만인의 연인' 마릴린 먼로와 결혼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은 2844달러였다.
10만 달러면 35배다. 호너스 와그너가 1908년 1만달러를 돌파한지 41년 만이었다. 10만달러가 100만달러로 바뀌기까지는 28년 걸렸다. 1978년 '무쇠팔' 놀란 라이언은 4년 450만달러에 휴스턴과 계약했다. 첫 '밀리언 달러' 맨의 등장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최초로 1억달러 계약이 이루어진다. 케빈 브라운은 1998년 12월 LA 다저스와 7년 1억500만달러 계약에 성공한다. 스포츠 사상 첫 1억달러 빅딜이었다.

이제 1억달러(약 1170억 원)는 놀랍지 않다. 클레이튼 커쇼는 2년 전 7년 2억1500만달러에 다저스와 합의했다. 연봉만 3000만달러다. 바로 어제(한국시간 2일) 데이비드 프라이스는 7년 2억1700만달러에 보스턴과 계약했다. 커쇼보다 200만달러 많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머니게임에서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남들보다 더 지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국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99년 자유계약선수(FA)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송진우는 3년 7억원에 계약했다. '억 소리' 난다고 다들 난리였다. 겨우(?) 7억 가지고. IMF(국제통화기금)의 상흔으로 잠시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2003년 정수근이 6년 40억6000만원으로 잠잠하던 FA 시장에 포성을 울렸다. 이듬해 심정수는 4년 60억원으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때만 해도 FA 시장은 '큰 손' 삼성이 주도했다. 삼성은 이후 사실상 외부 FA 시장에서 발을 뺐다. 그러나 한 번 당겨진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2013년 강민호 4년 75억원, 2014년 최정 4년 86억원, 장원준 4년 84억원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올해도 정우람이 4년 84억원, 박석민이 4년 96억원에 사인했다. 100억원이 눈앞이다. 구단들의 발표는 신뢰감을 잃었다. 실제로는 벌써 100억원을 넘겼을 것이라는 게 야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야구 선수의 몸값 폭등은 FA 제도 이후 일어난 현상이다. 커티스 프러드는 1964년 211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최다 안타 공동 1위였다. 7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할 만큼 수비도 발군이었다. 그런데 1969년 느닷없이 트레이드 통보를 받았다. 프러드는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3년을 끈 소송에서 패했다. 그는 야구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뜻밖의 씨앗 하나를 남겨놓았다. 프러드의 소송으로 인해 FA제도가 생겨났다.

FA제도는 당초 선수의 권리 보호를 위해 탄생됐다. '노예 계약'으로부터 선수를 해방시켰다.
처음엔 그저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때가 되면 마음대로 구단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데 몸값 폭등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대체 어디까지가 선수 몸값의 적정선인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texan50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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