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걷기 예찬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03 16:39

수정 2015.12.13 14:29

[데스크 칼럼] 걷기 예찬

최근 2~3년 사이 부쩍 인격(뱃살)이 늘었다. 연식이 오래된 까닭도 있겠지만 8할은 운동부족 탓이다. 거창하게 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일 한 시간씩 걷자고 다짐해보지만 작심삼일(사실은 작심하루)이다. 의지 부족에 의지 박약이다.

'두 다리가 의사'라는 말이 있다. 두 다리로 걷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성인병은 예방할 수 있다고 의사들은 증언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헬스의 '헬'자도 모르면서 균형 잡힌 몸매와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비결을 물어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권유한다. 제발 좀 걸으라고. 그럴 때 보면 그들은 꼭 포교에 나선 선교사 같다. 확신에 찬 어조에선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걷기의 신비로운 효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걷기는 몸의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듯하다. 속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속절없는 초광속의 시대에 느릿느릿 걷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뚜벅뚜벅 두 발로 걸을 땐 보인다. '내려 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이라는 고은의 시처럼, 우리는 자동차를 탔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두 다리로 걸으면서 비로소 본다. 그것의 이름은 배려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여유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걷기가 좋은 이유는 이뿐이 아니다. 걷기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문을 살짝 열어준다.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그들'도 아닌 바로 '나'에게로 가는 길 말이다. 속도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면 누구나 나를 놓치고 우리 혹은 그들에 뒤섞여 아웅다웅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인생은 결국 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나와의 만남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걷기 예찬론자인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렇게 권유한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여러 감정들을 불러내보라고. 그러다보면 나를 돌아보게 되고, 토닥토닥 위로가 되고, 마음에 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고.

걷기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반성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이럴 땐 시인, 철학자가 따로 없다. 걸으면서 만나는 나무와 풀과, 바람과 별과, 사람과 사람에 조응하며 우리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고 곱씹어보고 또 복기(復棋)한다. 또다른 걷기 예찬론자 크리스토프 라무르에 따르면, 인간은 시속 3~5㎞ 속도로 걸을 때 사물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숲길을 걸으며 철학을 했다는 소요(逍遙)학파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걷기는 우리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것의 이름은 (좀 멋쩍긴 하지만) 행복이다. 걷기가 제공하는 고독과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행복과 충만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심 속 길을 떠나 북한산 둘레길이나 제주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곳을 일부러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길에서 멀리 떨어진, 어쩌면 원시적이고 불편하기까지 한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몸에 의지해 걷고 또 걸으며 생각한다. 그러면서 행복을 갈구한다.
작심삼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다시 다짐해본다. 하루 한 시간씩 걸으면서 '인격'도 다스리고, 몸매도 관리하고, 행복도 챙겨보자고.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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