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바보처럼 살았군요"

지령 5000호 이벤트
재미없는 옛날 얘기 하나 해야겠다. 2005년 어느 날이다. 당시 하나로텔레콤 한 임원의 사무실에서 신기한 것을 봤다. 넓지 않은 방에 대형 TV 세 대가 나란히 있었다. TV에는 초고속인터넷 선이 연결돼 있었다. 그것부터 신기했다. 안테나선이 아니고 인터넷 선. TV 한 대는 디즈니 영화, 한 대는 어젯밤 봤던 드라마, 한 대는 지상파방송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임원은 사무실에서 인터넷TV(IPTV)를 실험해보고 있었던 거다. 지금은 주문형비디오(VOD)가 일상이 됐지만 당시엔 기사 쓸 때 상상만 하는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것을 실제로 본 것이다. 그 신기한 일은 결국 추운 휴일에 비디오테이프 빌리러 비디오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활의 변화였다. TV에 안테나선 대신 인터넷 선을 꽂으면 되는 거였다. 유레카!

하나로텔레콤은 1년쯤 뒤 VOD 기능만 가능한 IPTV를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놨다. KT도 그 상품을 내놓고 싶어했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상파 실시간 방송도 IPTV에 넣어 초고속인터넷의 부가서비스로 팔고 싶어했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통신회사인 KT가 방송을 하면 안된다고 반발했다.

문제는 그 반발을 잠재울 법이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누구도 인터넷 선을 TV에 꽂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였으니 그런 법이 있을 리 없다. 그때부터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7년 IPTV법이 만들어졌다. 2008년에는 정부도 방송통신위원회를 만들어 통신사의 방송사업을 지원했다.

내가 현장을 취재하며 본 우리나라 방송통신 융합의 시작과 과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발전한 것이 지금의 IPTV산업이다. 정확히 10년간의 일이다.

10년 동안 참 많은 기사를 썼다. IPTV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방송과 통신이 융합돼야 한다고 썼고, 정부가 나서서 방송통신 융합을 지원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다고 긴 기사를 썼다. 법이 만들어진 뒤에는 방송통신 융합의 성과와 융합이 만들어낸 생활의 변화를 소개했다. 산업지형이 달라지고 있다고…. 확신이 있었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해야 우리 정보통신기술(ICT)산업에 미래가 열린다는 것에 대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앞뒤 가사는 생각나지 않지만 어떤 노래의 한 대목이 며칠째 입안을 맴돈다.

재미없는 옛날 얘기를 길게 한 이유다. 며칠 전 KT의 고위 임원이 공개석상에서 "방송과 통신은 각기 다른 틀에서 성장한 산업으로, 융합산업에 대한 틀이 아직 없다"고 했다. 그 얘기에 서럽다. 방송통신 융합을 넘어 사물인터넷을 말하는 지금, 지난 10년간 함께 고민하고 발전이라고 믿었던 일이 '아직 틀도 못 잡은' 일로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서다.

나뿐 아니다. ICT산업을 취재했던 많은 기자들은 모두 방송통신 융합산업의 필요성과 성과를 기사로 썼다. 옛 정보통신부, 방통위, 미래창조과학부 공무원들도 하나같이 방송통신 융합산업 정책을 고민했다. 성공 여부는 모르지만 그 나름의 진일보한 성과를 냈다고 나는 평가한다.

SK텔레콤이 CJ헬로비전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KT는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을 위해 10년 이상 진행된 방송통신 융합산업 정책과 산업의 발전, 주변 사람들의 숱한 노력을 싸잡아 깎아내리는 것은 과하지 않았나 싶다. 괜히 서럽다. 그리고 서운하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