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들] 가족과 꿈을 위해.. 밤을 잊은 그대를 태우고 버스는 달린다

김승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05 17:59

수정 2016.01.05 17:59

삶은 잠들지 않는다
가구 공방 꿈 이루기 위해 자원해서 심야버스 운전
늦은 식당일 끝낸 中동포 "가족에게 보탬되니 좋아"
꿈은 이루어 진다
새벽 2시 버스 탄 여학생, 가수 꿈 위해 12시간 연습
대학전공 포기한 회사원, 패션사업서 과감한 도전
심야버스는 말 그대로 밤(0시~오전 5시)에만 다니는 버스를 말한다. 그래서 번호 앞에 '나이트(Night)'의 영문 앞글자를 딴 'N'자가 붙는다. 일명 '올빼미 버스'라고도 한다.

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나 새벽에 일어나 일터로 가는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달리는 심야버스. 그곳에선 하루의 끝과 시작이 교차한다. 그래서 심야버스에는 어제의 꿈과 내일의 희망이 오버랩된다. 손님들의 발이 되는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기사도, 이를 이용하는 손님도 모두 내일을 향해 달린다.


서울 강서구와 중랑구를 오가는 심야버스 N26번을 본지 수습기자들이 동행 취재했다.

심야버스 N26번 운전기사 이원우씨(55)는 낮에는 공방에서 가구를 만들고, 새벽에는 심야버스를 운전하며 희망을 찾고 있다. 이씨가 버스를 운행하기 앞서 손님들이 잡고 갈 손잡이를 닦고 있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심야버스 N26번 운전기사 이원우씨(55)는 낮에는 공방에서 가구를 만들고, 새벽에는 심야버스를 운전하며 희망을 찾고 있다. 이씨가 버스를 운행하기 앞서 손님들이 잡고 갈 손잡이를 닦고 있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주경야독', 심야버스 운전기사

N26번이 출발하는 5호선 개화역 인근의 강서공영차고지. 세상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고 사람들도 하나둘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오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바쁜 걸음으로 차고지로 들어오는 이가 있다. N26번 운전기사 이원우씨(55)다. 평소 출근하는 시간보다 30분가량 일찍 왔단다. "(인터뷰에서) 할 말이 많아 빨리 왔다(웃음)"며 기자를 재촉했다.

이씨는 2013년부터 심야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서울시에는 2013년 4월 N26번을 포함해 심야버스 2개 노선이 처음 생겼다. 지금은 8개 노선으로 늘어났다. 밤에 활동하는 '올빼미족'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씨는 심야버스를 운전하기 전엔 270번, 710번 등 주간버스를 몰았다. 경력만 16년째다. 그러다 자원을 했다. 새벽에 심야버스를 모는 일은 운전사들에겐 고역이다. 낮밤이 바뀐 데다 위험요소도 낮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지원자가 적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심야버스를 몰게 됐지." '하고 싶은 일'이란 게 뭘까. 알고 보니 그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낮에는 가구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없는 솜씨에 딸을 위해 책상을 만들어준 게 계기가 됐다.

"제멋대로 책상을 짜고 그 위에 한지를 붙이고 해서 딸에게 선물했지. 뛸 듯이 좋아하며 애지중지하던 (딸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전문적으로 가구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생계를 위해 낮에 버스를 몰던 그가 심야버스 운전기사가 된 이유다.

"자식들이 모두 직장에 들어가서 내년에는 좀 여유가 생겨. 공방이 마련되는 대로 내가 만든 가구 한두 개라도 전시하는 게 꿈이야."

신이 난 표정이다. 인터뷰하랴, 버스 청소하랴, 쉴 새 없이 분주하던 그의 손은 어느새 운전대를 잡고 있다. 출발이다.

서울시내 심야버스는 일반버스가 끊기는 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운행한다. N26번은 강서와 중랑을 오가며 새벽에 귀가하거나 일터로 나가는 시민들의 발이 되고 있다. 오전 3시인데도 버스는 승객들로 꽉 찼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서울시내 심야버스는 일반버스가 끊기는 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운행한다. N26번은 강서와 중랑을 오가며 새벽에 귀가하거나 일터로 나가는 시민들의 발이 되고 있다. 오전 3시인데도 버스는 승객들로 꽉 찼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0시30분, '패션 피플' 만나다

0시30분, 썰렁했던 N26번 버스가 염창역 정거장을 지나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청년 한 명이 운전기사에게 "합정동 가느냐"고 묻더니 차에 오른다.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회사에 근무하는 김기문씨(34)다. 회사 동료들과 맥주 몇 잔 기울이고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학원을 다니며 패션 마케팅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는 달랐지만 길이 이쪽이다 싶어 과감히 선택했다. 패션학원에서 만났던 강사가 지금 회사 사장이다.

"현재는 온라인 유통, 마케팅, 애플리케이션 제작 등이 주요 사업영역"이라며 회사를 소개한 김씨는 "올해는 회사가 유통분야 등을 더욱 확대해 돈도 좀 벌고 안정됐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특히 패션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혀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꿈을 제대로 펼쳐보고 싶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한 중년 남자가 김씨 뒤에서 물끄러미 대화를 듣고 있다. 중국동포 장학철씨(54)다. 한국에 온 지 10년 됐다는 그는 식당 일을 하며 번 돈을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

장씨는 "심야버스는 내가 단골이지(웃음). (버스 덕분에) 차비를 아낄 수 있어 다행"이라면서 "식당 일이 힘들긴 하지만 가족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으니 좋다"고 말했다.

오전 1시40분 정도가 되자 버스가 어느새 기점인 중랑차고지로 들어섰다. 을씨년스럽게 가랑비까지 내린다. 버스가 쉬어가는 시간은 10분 남짓. 급하게 볼일을 보고 온 운전기사 이씨는 잠을 쫓기 위해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반환점을 찍은 버스가 또 다른 손님들을 태우기 위해 출발한다.

■오전 2시, '미래의 아이돌' 타다

한참을 텅 빈 채로 달리던 버스에 앳된 얼굴의 소녀가 올라탔다. 시계는 오전 2시를 막 넘어가고 있다.

자신을 가수 지망생이라고 소개한 유수아양(18)은 매일 오전 2시께 N26번을 타고 목동에 있는 집에 간다.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음악학원 일정은 이 시간이 돼서야 끝이 난다. 12시간 이어지는 살인적 일과다.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학원에서 배운 대로 '다' 또는 '까' 말투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학원에 있는 동안은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고, 중간에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아이돌 가수가 되기 위해 유양이나 학원 동기들 모두 이쯤은 감수해야 한단다. 꿈이 있어 좋은 청춘이다.

오전 2시30분께 도착한 망우지구대 정거장에서 말쑥한 옷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버스에 오른다.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한다는 김경희씨(55)다. 그는 아들과 함께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오늘은 먼저 나가 있는 아들과 바통터치를 해야 한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져서 겨울옷 장사가 힘들다. 올해엔 모든 국민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마음이라도 따뜻했으면 좋겠다면서 김씨가 건넨 말이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3시30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심야버스 N26번도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엔진 소리도 꺼졌다. 4시간 가깝게 밤길을 운전한 이씨도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심야버스에 오르고, 내렸다. 어떤 이는 집으로 가고, 어떤 이는 일터로 간다.
자신만의 가구를 꿈꾸는 가장, 패션계를 호령해보겠다는 30대 젊은이, 식당 일을 하며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동포, 아이돌 가수를 꿈꾸는 소녀, 옷가게 주인 아주머니 등. 그들이 모두 내일의 주인공이다.

bada@fnnews.com 김승호 기자 김진호 이진혁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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