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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조선업 금융딜레마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19 16:50

수정 2016.01.19 16:50

[차장칼럼] 조선업 금융딜레마

지난해 11월 취재차 들렀던 필리핀에서 한진중공업 이름을 새롭게 봤던 기억이 난다. 필리핀에서 한진중공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필리핀의 하늘과 땅, 바다 어디서든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이름이 '한진'이다. 낯선 이방인을 처음 맞는 공항부터 시내로 뻗어 있는 경전철, 그리고 각종 도로와 항만까지 필리핀 전역의 인프라를 도맡아 공사한 곳이 한진중공업이다. 한진은 1970년대 초반부터 나라 전체가 밀림 같았던 그곳에서 숲을 헤쳐 길을 냈고, 수천개 섬들 사이로 다리를 놨다.

필리핀은 한진 덕분에 조선 강국 이미지도 얻고 있다.
마닐라에서 북서쪽 11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진의 수비크조선소는 완공 6년 만인 지난해 누적 건조척수 100척을 돌파했다. 필리핀은 국가별 수주량 순위 한·중·일 다음 자리를 꿰찼다. 제조업체가 빈약한 필리핀에서 수비크조선소는 현지 젊은이들에게 인기였다. 현지 교사 월급보다 나은 임금 수준, 근사한 한진빌리지 등도 이유가 됐다.

수비크조선소는 규모로 한계에 봉착했던 한진의 부산 영도조선소 대안으로 출발한 곳이다. 영도조선소는 1937년 설립된 조선공업사가 전신이다. 한진중공업은 이 국내 첫 조선업체를 인수, '조선업 종갓집'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영도조선소는 본격 성장기를 앞뒀던 시기 투자를 놓치면서 선박 대형화 흐름을 쫓아가진 못했다.

한진중공업은 수비크행 결정을 '신의 한 수'로 여긴다. 인건비는 중국보다 싸고 필리핀 정부지원은 전폭적 수준이어서, 여기서라면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까지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극심한 노사분규로 회사 존립 자체가 흔들렸던 때도 분명 있었건만, 한진은 수비크를 발판으로 조선 종갓집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종갓집의 운명이 한갓 2000억원에 갈팡질팡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던 것 같다. 2조원대 알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2000억원 대출 연장을 못해 한진중공업은 지난 7일 갑작스레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했다. 내부에선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지난해 국내 조선 대형사들이 동시에 조 단위 손실을 내며 사상 초유의 쇼크를 기록하던 순간, 한진은 나홀로 흑자를 보이기도 했다. 채권단은 고심 끝에 자율협약을 받아들여 이달 긴급수혈에 나설 모양이다. 한진은 그 대가로 4월까지 정상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채권단의 이번 반응은 지금 조선업 환경을 평시가 아닌 전시상태로 받아들인 결과다. 고난의 터널 속에 갇힌 조선업 현주소를 다시 보게 한다. 하지만 이 전시상태에 진가를 발휘해야 할 금융권 판단력에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하는 게 문제다. 업이 좋을 땐 현금을 챙기려고 줄을 섰던 금융권이 지금은 기준도 없이 막무가내로 돈을 틀어쥐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쓸 곳, 안 쓸 곳 구분도 못하고 원칙도 없다는 말까지 들린다.
하지만 금융권에선 과거와 같을 순 없지 않겠느냐고 항변한다. 결국 딜레마다.
올해마저 삐끗하면 회복불능이라는데,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다.

jins@fnnews.com 최진숙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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