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지방자치를 허하라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25 16:58

수정 2016.01.25 16:58

중앙집권식 통제는 낡은 유산
대신 지자체 파산제 도입해 엉터리 시장·군수 솎아내야
[곽인찬 칼럼] 지방자치를 허하라

다산 정약용이 황해도 곡산(谷山) 부사로 있을 때(1798년) 일이다. 조정에서 곡산의 좁쌀과 콩을 돈으로 바꿔서 바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좁쌀.콩을 몽땅 팔아도 위에서 요구한 금액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다산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거기에 명령을 따를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적었다. 장계에 이르길 '거북 등에서 어떻게 털을 뽑을 것이며, 토끼 머리에서 어떻게 풀을 뽑을 것인가'라고 했다.
다산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정 중신들은 "나라가 나라인 것은 기강 때문"이라며 다산을 파직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정조는 "지키기 어려운 일을 시키면서 수령에게 죄를 묻는 것은 잘못"이라며 되레 명령을 철회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신하에 그 임금이었다.

지방 일은 지방이 제일 잘 안다. 그러나 중앙집권 전통이 강한 조선에선 지방이 설 자리가 없었다. 원로 정치학자 진덕규는 "조선왕조는 지방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여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통치체제를 정립했다"고 분석했다('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과거급제자들은 지방 수령 파견을 좌천으로 여겼다. 다산도 '천주학쟁이'로 의심받은 일만 없었다면 지방으로 내려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산이 감히 조정에 대든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다산을 끔찍이 아꼈다. 곡산 부사 시절 다산의 시정은 예외로 보는 게 옳다.

한국 지방자치가 20년을 넘겼지만 중앙이 지방을 내려다보는 전통은 유구하다. 지난주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은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거부한 교육감들을 겨냥, "이는 법질서와 국가기강에 대한 도전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반란"이라며 "반란은 진압돼야 한다"고 말했다. 200여년 전 기강을 강조하던 조정 대신들의 말투가 묻어 있다.

스물 넘었으면 다 컸다. 엄마 잔소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믿고 맡기는 게 피차 좋다. 기업들은 정부의 역할이 헬리콥터맘에서 빗자루맘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시콜콜 간섭하지 말란 얘기다. 정부는 사고처리반 역할에 그칠 것을 주문한다. 중앙.지방정부 관계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중앙정부는 경쟁자가 없다. 당연히 효율성이 떨어진다. 반면 지방정부는 자기들끼리 경쟁한다. 놔두면 저절로 효율성이 높아진다. 중앙에서 돈을 꼭 틀어쥐고 지방을 통제하던 시대는 지났다.

경기도 성남시의 청년배당 상품권이 인터넷 깡(할인거래) 논란에 휩싸였다. 보건복지부는 즉각 중앙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품권을 지급한 이재명 시장을 비난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라고 가세했다. 이재명표 복지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지방자치 역사에선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것 같다. 현 정권엔 미운털이지만 지방자치 공헌도만큼은 이 시장이 전국 1위다. 본인은 전국구 정치인으로 컸다. 성남시 3대 무상복지는 대법원에 제소돼 있다. 판결 여하에 따라선 큰 파장이 예상된다.

지난 반세기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는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온 나라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획일주의는 한계를 맞았다. 로봇.바이오.인공지능 등 제4차 산업은 열린 사고에서 출발한다. 이들이 21세기 나라의 장래를 좌우한다. 그래서 정부도 창조경제 깃발을 들지 않았는가. 이제 중앙의 힘을 지방에 넘길 때가 됐다. 거기서 혁신과 다양성이 나온다. 기득권에 집착할수록 고약한 갑질로 비칠 뿐이다.

중앙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지자체 파산제 도입이다. 자금난에 빠진 기업은 자산부터 판다. 그래도 살아나지 않으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그래도 안 되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는다. 지자체에도 같은 룰을 적용할 수 있다. 3년 전 미국 디트로이트시는 우리돈 20조원 빚을 지고 파산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공공자산을 매각하고 공무원 연금도 깎았다.
데이브 빙 시장의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다. 그는 연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 시장도 빙 시장의 몰락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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