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차장칼럼] 기계는 돌아야 녹슬지 않는다

김승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2.18 17:05

수정 2016.02.18 17:07

[차장칼럼] 기계는 돌아야 녹슬지 않는다

2013년 8월 말의 어느 날 저녁,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 음식점. 기자는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표 몇 분과 술잔을 기울였다. 어두운 터널의 끝자락에서 함께하는 자리라 더욱 뜻깊었고, 분위기도 훈훈했다. 오랜 기간 시름에 잠겼던 사장님들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비쳤다. 개성공단에 있는 이들의 공장은 그해 4월부터 가동을 멈춘 채 문을 닫아야 했다. 북측의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 전원 철수에 대해 우리 측이 남측 인원 철수로 맞불을 놓으면서다. 무덥고 습기가 많은 여름을 지나면서 공장의 기계는 녹이 슬고, 제품 생산을 위해 쌓아놓았던 원·부자재는 썩어나갔다.


그러다 8월로 넘어오면서 남북 양측이 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하면서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사태가 재발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한 '8·14 합의문'이다. 개성공단의 기계가 멈춘 지 150일가량이 지난 시점에서다.

그사이 부산에 본사를 둔 A사장님은 경부선 열차에 수십차례 몸을 실어야 했다. 흰머리가 더욱 늘었음은 물론이다. B사장님은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자신의 차에 '가고싶다 개성공단'이란 글씨를 쓰고 서울 시내를 미친 듯이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개성공단을 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C사장님은 "남과 북 양쪽을 믿고 공단에 들어가 공장을 돌린 죄밖에 없다"며 만날 때마다 울분을 토했다. 그날 같이 술잔을 기울였던 사장님들은 다행히 추석을 며칠 남겨 놓고 꿈에 그리던 개성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먼지가 쌓인 공장, 녹이 슨 기계, 떠났던 거래처 확보 등 할 일은 태산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2016년 설이 이틀 지난 2월 10일. 사장님들은 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정부가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이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에 질세라 북측은 아예 공장 자산을 동결하고 근로자들을 남으로 쫓아냈다. 남은 물건들을 가져올 새도 없었다. 2013년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됐다.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설 연휴 중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공단 폐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정치적 줄다리기에 개성공단이라는 경제를 활용한 것이다.

개성공단만큼은 정경 분리를 통해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그동안의 여론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 때문에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쳤던 박 대통령의 외침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구상도 무위로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 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DMZ 평화공원'도 추진이 어려워졌다.

남과 북이 개성공단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 120여곳의 개성공단 기업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쳐봤자 잃은 소가 돌아오진 않는다. 벌써 개성공단 대체부지가 설익은 채 논의되고 있지만 어느 곳도 개성공단을 대신할 수는 없다. 개성공단은 단순히 공장들이 몰려 있는 공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측의 자본력과 북측의 노동력이 공존해 작품을 만들던 개성공단은 궁극적으로 통일비용을 아낄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라고 말하던 한 기업가의 말이 자꾸 뇌리를 스친다. 구태여 정부가 나서서 남북 긴장관계를 조성할 필요가 없다던 한 전직 장관의 조언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 공장의 기계도 돌아야 녹이 슬지 않는다.

bada@fnnews.com 김승호 정치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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