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0년차 걸그룹 연습생의 슬픈 자기소개서

사진:연합뉴스 제공

#.저는 연예기획사 소속 연습생입니다. 21살부터 시작해 지금은 31살, 연습생 생활만 어느덧 10년째네요. 오로지 걸그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이 악물고 버텼지만,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어리고 예쁜 10대들이 즐비한 이 시장에서 아이돌 그룹 평균 나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30대인 제가 데뷔 '문'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입니다.

■"춤추고 노래하고…연습실에 청춘 다 바쳤건만"
한국에는 수십개의 연예기획사가 있습니다. 각 회사마다 연예인을 꿈꾸는 저 같은 연습생들이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30여명에 달합니다. 한류가 급성장하면서 어린이 장래희망 순위에 연예인이 1~2위를 다투는 시대입니다. 연습생 수만 어림잡아 1000여명이 넘는다네요.

좌절의 연속이 일상이 돼버려 이젠 화도 안 납니다. 대신 '무엇이 잘못됐나'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다시 못 할 만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노래와 춤, 운동, 식단 조절을 병행했습니다. 진짜 제 노력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그렇다고 재능이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살면서 "노래 잘한다" "예쁘다" 소리는 질릴 정도로 들었습니다. 이 길이 천직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형 연예기획사를 포함해 수많은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회사, 투자자, 멤버 문제 등의 사정으로 매번 데뷔 문턱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그 동안 저와 함께 연습했던 많은 친구들이 데뷔했습니다. 그 중에는 톱스타가 된 친구도 꽤 있습니다. 주위에선 "너랑 연습하면 다 성공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저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최근 한 방송사에서 걸그룹 공개 오디션을 포맷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01명의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서바이벌 오디션을 치루는 내용인데 제가 아는 얼굴도 적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언젠간 나도 저들과 같이 무대에 설 것만 같았는데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10년차 연습생, 남은 건 '성형 빚'
제 손엔 빚만 남았습니다. 데뷔조였기에 TV 화면에 잘 어울리도록 성형수술을 수차례 했습니다. 눈, 코, 턱, 이마, 가슴까지… 단지 TV에 더 예쁘게 나오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곳까지 손을 댔습니다. 당시는 데뷔만 하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수천만원의 수술비는 푼 돈으로 여겼고, 이를 모두 빚으로 충당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조바심은 늘어만 갔고, 늦어지는 데뷔를 외모 탓으로 돌리면서 성형 중독은 심해졌습니다. 비가 오면 얼굴이 시리고 아픕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거울 속의 저를 보니 요즘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조롱하는 '강남 언니'가 서 있더군요.

이런 삶을 살다보니 제 인생에 큰 회의감이 듭니다. 친구들에겐 "40살까지만 살고 죽겠다"는 말도 줄곧합니다. 늙는 게 무섭습니다.

걸그룹 데뷔 몸무게라는 것이 있습니다. 163cm 이하는 38kg라는 데뷔 몸무게를 맞춰야 합니다. 제 키는 160㎝인데 10년 동안 미친 듯이 굶고, 또 굶었습니다. 두부만 한 달을 먹은 적도 있고, 종일 운동하는데도 고구마 한 쪽 우유 하나가 하루 식단의 전부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영양제를 같이 먹기 때문에 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먹지 못하는 스트레스로 생리불순이나 탈모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매주 금요일은 몸무게를 검사하는 날입니다. 그럼 토요일과 일요일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음식을 먹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먹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네요. 안 믿기겠지만 하루만 이렇게 먹으면 2~3㎏이 쪄있습니다. 다시 운동하고 굶어서 금요일까지 원래 몸무게를 맞춥니다. 몸무게 변동이 이렇게 크다는 것은 몸이 이미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걸그룹 지망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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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엄두도 못 낸 나의 사생활
저는 데뷔조 친구들과 회사에서 마련한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기숙사 내부에는 CCTV가 설치돼 있습니다. 회사는 실시간으로 우리 생활을 들여다보고, 수시로 냉장고를 체크합니다.

이 생활이 익숙해지자 우리는 몰래 숨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몸무게 관리 때문에 토하고, 먹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거식증과 비슷했지만, 토할 수 있으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런 행동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특히 생리 시기가 가까워지면 식욕이 더 왕성해져 심해졌습니다. 어느 날 회사로부터 토하는 것을 들킨 저는 깜짝 놀랬습니다. CCTV에 제가 토하는 소리와 장면이 선명하게 녹화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점점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성 교제도 속 시원히 한 적이 없습니다. 이성 교제 금지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귀던 남친에게도 모질게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지방 출신에 의지할 곳 없는 저는 너무 외로웠지만 단 하나의 꿈, 데뷔만 보고 꾹 참았습니다.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폭로한 연예인 지망생들의 성접대 의혹 보도는 제가 아는 실상과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저도 재력가나 투자자 등 이른바 '스폰서'라는 사람들에게 그런 제안을 여러번 받았습니다. 빠른 데뷔라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문 몇몇은 실제로 데뷔가 빨랐습니다. 한 유명 기획사에선 스폰을 받는 것이 데뷔하기 전 통과 의례라는 얘기도 이 바닥 연습생들은 공공연히 알고 있습니다. 데뷔가 간절한 만큼 연습생들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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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좌절되면 대안없는 아이돌 시스템
연습생도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데뷔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연습생들도 SNS을 통한 개인 팬덤이 상당합니다. 밤 늦은 시간까지 연습실 앞에서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 덕분에 희망을 먹고 버텨냅니다. 결과적으로 저에겐 이들의 응원이 '희망고문'이 됐지만, 팬이란 존재는 입대한 장병의 여자친구처럼 소중합니다.

물론 모든 연습생이 데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도 똑같은 무한 경쟁이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실패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저희들은 어린 나이에 학업, 자기계발을 다 포기하고 데뷔에만 메달려 왔습니다. 연습생은 데뷔가 무산되면 대안이 없습니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모' 아니면 '도'인 이 시스템은 저 같은 사람을 한 순간에 낙오자로 만듭니다.

연간 데뷔를 준비하는 아이돌 팀이 300개가 넘는데도 이제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회사도 저에 대한 투자를 접으려는 눈치입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방출'될 것 같습니다. 미래에 투자하는 회사 입장에선 데뷔가 무산된 저는 '손실'이겠죠.

서글픕니다. 저는 10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걸까요. 결국 이 길을 선택한 것도 저 자신인데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요. 그냥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만큼 제 노력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을까요. 저는 정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아직 연습실에 친구들을 응원합니다.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본 기사는 본지가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기사 내용과 관련성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