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한국판 양적완화, 없던 일로 하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4.18 16:35

수정 2016.04.18 16:35

美서 성공한 건 경제체질 덕.. 日서 실패한 건 불량체질 탓
우린 日과 닮은꼴.. 실패 확률 커
[곽인찬 칼럼] 한국판 양적완화, 없던 일로 하자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면 양적완화의 아버지는 버냉키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양적완화 정책에 성공하자 유럽.일본이 뒤를 따랐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총선에서 나왔다. 먼저 얘기를 꺼낸 새누리당이 선거에서 지는 바람에서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됐지만 그래도 불씨가 다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우리 경제에 특효약일까 독약일까. 솔직히 헷갈린다. 잠재성장률이 뚝뚝 떨어지는데 멍하니 있는 건 분명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한국은행의 팔을 비틀어가며 돈을 푸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도 의문이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양적완화의 '원조'인 버냉키의 회고록 '행동하는 용기'를 다시 읽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판 양적완화는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 하지 않는 게 낫겠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미국판 양적완화는 버냉키가 줄곧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를 연준 의장으로 발탁한 조지 W 부시, 재임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버냉키를 밀어줬다. 양적완화는 경제원론에서 볼 수 없는 비상대책이다. 이런 별난 정책을 수행하려면 행정부,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지지가 절대적이다.

이런 호조건 아래서도 버냉키는 정치권, 특히 야당인 공화당의 잦은 태클에 시달렸다. 양적완화가 자산 버블과 인플레이션, 달러 가치 하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비판의 단골 메뉴였다. 버냉키는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연준의 신비주의를 버렸다. 대신 TV 시사프로그램(CBS '60분')에 출연하고 신문에 기고(워싱턴포스트지)하는 등 파격 행보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린 어떤가. 연준은 우리로 치면 한은이다. 열쇠를 쥔 이주열 총재는 한국판 양적완화 구상에 부정적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도 영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렇다 할 견해를 밝힌 적이 없다. 미국 사례에서 보듯 양적완화의 성패는 중앙은행 수장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지금 이 총재에게 버냉키식 열정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이 총재의 임기는 2년 남았다. 한은이 버티면 한국판 양적완화는 발조차 떼기 힘들다.

회고록에서 버냉키는 미국 경제를 낙관하는 세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젊은 미국이다. 미국은 다른 선진국은 물론 많은 신흥국보다 오히려 출산율이 높고 이민에도 개방적이다. 둘째, 끊임없는 기술혁신이다. 버냉키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연구대학의 대다수가 미국에 있고, 기술 진보를 상업화하는 데도 훨씬 더 익숙하다"고 말한다. 셋째, 지칠 줄 모르는 기업가정신과 시장의 역동성이다. 여기서 신사업, 신상품이 줄기차게 나온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미국 경제는 제로금리, 양적완화만으로 살아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버냉키가 말한 3종 병기다. 젊은 미국, 기술혁신, 시장의 역동성이 미국 경제를 나락에서 구한 밑거름이 됐다. 기름진 땅에 씨를 뿌리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동시에 나는 왜 미국에서 성공한 양적완화가 일본에선 실패했는지 원인을 깨달았다. 미.일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일본이 양적완화에 쓴 돈은 미국보다 많다. 하지만 경제는 도통 살아날 기미가 없다. 일본은행은 고육책으로 마이너스 금리라는 초비상책까지 동원했으나 역효과만 돋보인다. 왜 그럴까.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다.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테슬라 같은 혁신기업도 드물다.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한국은 어느 쪽일까. 누가 봐도 일본과 닮은꼴이다. 한국은 일본만큼 늙었다. 기술혁신도 기득권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괜히 미국 흉내 내려다 큰코 다칠까 걱정이다. 양적완화보다는 체질개선에 힘을 쏟아야 한다.
길은 멀지만 이게 정석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판 양적완화가 아니라 한국판 알파고다.
게다가 새누리당은 국회의 주도권마저 빼앗겼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없던 일로 하자.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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