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영원히 날아가 사라진 전설의 헤비급 챔피언 알리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04 16:43

수정 2016.06.04 16:43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구호와 복싱 스타일로 유명했던 전설의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 미국의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알리의 가족들은 성명을 통해 사망 사실을 발표했다. 올해 74세였던 알리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최근 호흡 곤란 증세로 위독한 상태로 사망이 임박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해왔다.

알리가 가장 최근에 공식 행사에 나타난 것은 지난 4월 피닉스에서 열린 파킨슨병 퇴치 모금 행사였다. 당시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매우 쇠약한 모습을 보였다.

1942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캐시어스 클레이로 태어난 알리는 아끼던 자전거를 절도 당하자 인근 경찰서로 찾아가 도둑을 혼내겠다며 복싱에 입문했다.
6년동안 아마추어 선수를 지맨서 지난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귀국한 알리는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에 분노를 느껴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으로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프로로 전향한 알리는 지난 1964년 강타자 소니 리스턴을 누르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됐으나 흑인 이슬람 단체인 ‘네이션오브이슬람’에 가입한 후 본명인 캐시어스 클레이는 노예 이름이라며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을 해 복싱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알리는 이슬람 단체 가입에다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던 당시 미 육군 징집까지 거부하면서 미국 백인들의 증오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1967년 징집 거부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복싱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

3년만에 링에 복귀할 수 있었던 알리는 1971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으로부터는 무혐의 판결을 받고 정상인이 됐다.

공백에도 불구하고 링에 복귀한 알리는 32세에 당시 무쇠주먹을 자랑하던 무패의 챔피언 조지 포먼과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에서 열린 명승부에서 8회 KO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타이틀을 재탈환했다.

1975년에는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필리핀 마닐라에서 혈투 끝에 프레이저가 15회 시작 공이 울리기전에 기권해 승리했지만 알리는 당시 “내 생애 죽음에 가장 가까운 체험이었다”라고 말했다.

1978년 리온 스핑크스에 패한 알리는 뉴올리언스에서 7만 관중이 보는 앞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판정으로 세번째 벨트를 차지한 후 은퇴했다.

그러나 타이틀에 대한 미련에 1980년 10월 자신의 전 스파링 파트너였던 WBC 세계 챔피언 래리 홈즈에게 무모한 도전을 했다가 제대로 주먹을 날리지도 못하고 맞기만 하자 11회 공이 울리기전에 트레이너 앤젤로 던디가 주심에 경기 중단을 요청해야했다.

알리는 1981년 바하마에서 트레버 버빅과 마지막 경기를 벌인 후 통산 56승 5패 37 KO승의 전적을 남기고 영원히 링을 떠났다.

그후 알리는 네번째 부인인 로니와 이슬람을 알리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1990년에는 당시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됐던 미국인 15명의 석방의 이끌어내기도 했다.

알리는 선수 시절 얼굴에 무려 2만9000번이나 펀치에 맞으면서 5700만달러(약665억원)를 벌었지만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회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는 용기 없는 사람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알리의 고향인 루이빌에서는 4일 추모 행사를 열 예정이며 그레그 피셔 시장은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jjyoon@fnnews.com 윤재준 국제뉴스 전문기자
jjyoon@fnnews.com 윤재준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