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 있고 글줄깨나 읽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일 중 하나가 한국인들이 일본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36년 식민지배를 겪은 역사적 앙금을 고려해도 경제규모, 인구, 국제적 위상 등에서 여전히 한국보다 많이 앞선 일본을 하찮게 보는 인식이 놀랍다는 것이다. 또 38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한에서 수차례 핵실험을 했지만 북핵에 별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도 이상하게 본다.
일본 관련 뉴스는 '저성장' '고령화' '잃어버린 20년' 등 부정적 내용이 많다. 지진 등 천재지변도 자주 접하는 일본 소식이다.
하지만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일본의 물밑 움직임은 분주하다. 아니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한국, 중국은 물론 미국 내 논란에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원폭 투하지 히로시마 방문을 이끌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 카드를 활용,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라는 폄하에도 '전범국가'를 벗어나려는 일본의 끈질긴 노력이 결실을 본 것으로 보는 게 맞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 기업들의 행보다.
한국과 일본의 주요 기업들은 자동차, 반도체, 전자, 철강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쉼 없이 변신하고 있다는 의미는 역으로 한국 기업에는 실재적 위험이란 것이다. 황색 경보등이 아니라 빨간색 경고등이다.
자동차기업들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진다. 방향은 인공지능(AI)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인 일본 도요타는 최근 구글의 로봇 자회사 2곳과 인수협상을 벌이고 있다. 로봇기술을 자율주행차 등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지난 1월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AI 자회사인 '도요타리서치인스티튜트'를 설립하기도 했다. 일본 닛산자동차도 약 1000억엔을 첨단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자금은 핵심 계열사를 판 돈으로 마련한다. 또 다른 자동차기업 혼다 또한 AI 연구를 위해 '혼다이노베이션연구소도쿄'를 오는 9월 도쿄 인근 아카사카에 설립한다.
인수합병을 통한 변신도 드물지 않다. 미쓰비씨오일, 규슈오일 등 5개 정유기업이 합병해 출범한 JX홀딩스가 대표적이다. 2010년 합병 이후 정유를 넘어 석유개발, 금속, 광물 등으로 사업분야를 다각화하고 있다. 성장성 없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한 캐논은 '선택과 집중'에 성공한 사례다.
일본의 변신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일본 대표기업 도요타 사례만 봤을 때 그렇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전통 제조업의 결합을 화두로 내세웠지만 선발주자인 미국의 테슬라, 우버 등에 뒤진다. 다만 부러운 것은 일본 정부와 기업 모두 구조조정, 산업개혁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갈 길은 일본과 비교해서 한참 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8년간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지도 못하다가 지난 8일 겨우 조선.해운 구조조정계획을 내놓았다. 부실을 정리해야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데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 앞으로 정부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국내 산업계가 나아갈 큰 방향과 밑그림을 제시하고 금융권과 기업들이 이에 맞춰 움직이도록 기반을 조성해줘야 한다. 한국은 은연중 무시하는 일본보다 아직 많이 늦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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