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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농업혁명의 불씨 된 '농가집성'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20 17:08

수정 2016.06.20 17:08

[fn논단] 농업혁명의 불씨 된 '농가집성'

"농사가 천하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 조선시대 경제의 근간은 농업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에는 오랜 기간 제대로 된 농업 실용서가 없었다. 고려 때 중국의 농업서적이 들어왔다지만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농서가 출간된 것은 세종대왕 시대에 들어서였다.

1429년 세종은 정초 등에게 명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토록 했다. 노련한 농부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동안 유학과 시문에 대한 책은 그런대로 풍부했지만 농업서는 '농사직설'과 강희맹이 은퇴 후에 쓴 '금양잡록' 정도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백년쯤 뒤,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던 한 작은 지방의 수령의 손에 의해 한 권의 농서가 탄생했다.

1655년 공주목사 신속이 예전의 농서는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내용도 오래되어 변화된 농법을 담고 있지 못한 실정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농가집성'이란 책을 편찬했다. 그는 과거 급제 후 몇 차례 요직에 천거됐지만 역모죄를 저지른 김자점과 인척 관계라는 이유로 줄곧 지방 한직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농사직설'에 '금양잡록'과 '사시찬요'을 덧붙이고 부록으로 '구황촬요'를 넣고 최신 농법으로 내용을 보완해 한 권의 농업 종합서를 만들었다. 다행히 이 책은 효종의 높은 평가를 받아 조정의 후원으로 인쇄돼 지방에 배포됐다. 심지어 이 책은 그 후 민간 출판에 의해 방각본으로도 간행돼 널리 보급됐다.

'농가집성'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기폭제가 됐다. 모판에서 모를 기른 후 물 댄 논에 옮겨심는 이앙법은 잡초제거 일손을 크게 덜 수 있어 농촌 노동력의 여유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밭작물의 겸작도, 또 보다 넓은 농지에서의 경작도 가능하게 됐다. 밭농사의 경우도 이랑과 이랑 사이에 골을 파고 파종하는 견종법이 보급되면서 밭작물의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뿐만 아니라 목화, 녹두, 팥, 콩, 참깨, 삼, 피, 수수 등 다양한 작물의 재배법이 소개되면서 특용작물에 특화된 농가도 생겨났다. 농업 생산력이 자급자족 수준을 벗어나게 되자 농작물을 주변 시장에 내다 파는 상업경제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 후기, 한반도에는 농업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농서가 출간됨으로써 새로운 농사기술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와 더불어 농기구와 수리시설이 개선돼 농산물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장마당이 열리고 화폐가 보급되면서 농촌 사회에는 부농 계층이 등장하고 특용작물에 특화된 상업적 농업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농촌 경제의 활력을 가져와 조선을 지탱시키는 힘이 되었다.

'농가집성' 이후 실학자들의 다양한 농업 저술이 뒤를 이었다.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박지원의 '과농소초',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이다. 특히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농업생활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방대한 필생의 역작이었지만 아쉽게도 출간.보급되지 못 했다.
반면, 신속의 '농가집성'은 기존의 도서들을 합본한 뒤 일부 내용을 개작한 데 불과했지만 출판을 통해 널리 퍼짐으로써 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중앙의 고위직도 아닌 지방 수령으로 오로지 백성들의 실생활에 유용한 책을 펴낸 신속, 그럼에도 그는 실학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조선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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