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위기 속 오아시스 찾는 국가들, 이란] 외국기업 직접투자 원하는 이란, 한국기업엔 기회의 땅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22 18:12

수정 2016.06.22 22:30

파이낸셜뉴스 창간 16주년 기획, 저성장 극복 '소프트 파워'에 길이 있다美 경제 제재 해제 이후 세계 몇 안되는 新시장"외국기업 지원준비 완료.. 우리에게 수출하지 말고 이란서 만들어 팔아라"
[위기 속 오아시스 찾는 국가들, 이란] 외국기업 직접투자 원하는 이란, 한국기업엔 기회의 땅

[위기 속 오아시스 찾는 국가들, 이란] 외국기업 직접투자 원하는 이란, 한국기업엔 기회의 땅

【 테헤란.타브리즈.케르만샤(이란)=안승현 기자】 지난 5월 23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방문했다. 이곳은 이란에서 서서히 시작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진원지다. 이슬람 혁명 이후 정체된 산업발전과 지난 10년간 서방세계의 제재로 이란의 시계는 타임캡슐 속에서 멈춰 있었다.

이란은 정체에서 벗어나 성장궤도로 진입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들에는 떠오르는 신시장이기도 했다.

테헤란을 십자가 형태로 나눴을 때 정확히 북쪽 가운데에 위치한 '파르시안 아자디 호텔'. 오랫동안 경제제재를 받아 대부분의 건물이 낡은 테헤란에서 보기 드물게 최신 시설을 갖춘 고급 호텔이다.


경제제재가 해제된 이후 테헤란을 찾는 해외 비즈니스맨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호텔답게 입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급 승용차가 즐비했다. 이 중 눈에 띄는 차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 현대차의 그랜저였다. 어쩌다 한두 대가 아니라 호텔 로비로 들어오는 세단 10대 중 3~4대는 그랜저와 싼타페였다. 그것도 서울 시내에서 볼 수 있는 최신 모델들이다.

테헤란뿐이 아니다. 이란 최대 공업도시인 타브리즈,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 인근 소도시 졸파,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케르만샤에 이르기까지 도로 위의 녹슨 '고물' 차들 틈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새차는 대부분 현대차와 기아차였다. 신기한 점은 이란에서 공식 판매되는 현대차는 현재 극소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제야 막 한국 기업들이 진출 채비를 하고 있는 중동의 이국에서 이미 한국의 최신 승용차들이 거리를 버젓이 달리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고급호텔 앞에 기아차의 옵티마, 현대차의 싼타페(왼쪽부터)가 주차돼 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고급호텔 앞에 기아차의 옵티마, 현대차의 싼타페(왼쪽부터)가 주차돼 있다.

이란 타브리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통신기기 매장 진열대에 한국산 휴대폰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란 타브리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통신기기 매장 진열대에 한국산 휴대폰들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는 몰랐다…곁에 있었던 이란시장

현지 관계자들에게 어떻게 수출하지도 않고 있는데 현대차가 이란에서 팔리느냐고 묻자 터키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 개인 수입업자들이 들여온다는 것이다. 사실상 '밀수'에 가깝지만 차뿐만 아니라 부품까지도 그렇게 들여와 사후관리(AS)까지 온전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란 현지인 가이드 메수트(31)에게 현대차 가격이 싸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유럽산 자동차가 가장 고급이고, 현대차는 그 다음으로 비싼 차라는 대답이었다. 10년 동안 닫혀 있던 시장에서 광고 한번 하지 않은 한국 자동차 브랜드 치고는 놀라운 위치다.

이란인들은 우리가 이란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한국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테헤란에 가보면 우선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쉴 새 없이 방송된다는 점에 놀란다. '주몽'과 '대장금'은 3~4번째 재방송 중이며, 지금은 '동이'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리 주위에 이란의 공식 언어 페르시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란에서 한국 연예인들 이름을 줄줄 외우고, 한국말 몇 마디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난달 23일 서울로가 위치한 테헤란의 북쪽 '테란 국제전시장'에서는 KOTRA의 '한국상품전시회'가 열렸다. 사흘간 열린 이 행사에는 1만5000명이 넘는 현지인이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순방 이후 현지에서 한국 기업과의 비즈니스를 원하는 기업이 부쩍 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면적이 3000㎡에 불과해 전시장은 81개 한국 기업 부스와 이곳을 찾은 이란인들로 하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전시관을 열고 참가한 건우머시너리 나인찬 대표는 "과거 9년간 거래하다 연결선이 끊겼는데 거래를 재개하기 위해 이번에 전시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나 대표는 "이란은 한국인들이 사업하기에 환경이 좋은 것 같다. 한국 기업에 대한 인식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제제재 해제, 이란에 부는 변화의 바람

이날 전시장에는 이란 현지인 여대생들도 다수 눈에 보였다. 이들은 한국대사관이 현지인을 위해 개설한 '세종학당'에서 한글을 배운 이들이었다. 샤자리트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네다(23)는 한국어를 배운 지 2년밖에 안 됐다는데도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능숙했다.

네다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한국의 문화는 이란과 대단히 비슷하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는 가정이나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들은 이란 사람들과 같다"며 "한국어를 배워 기회가 되면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고 말했다.

테헤란에서 무역업체와 여행사를 운영하는 한국 교민 김인순 디렉터는 "이란의 젊은층 중 여성들은 이란 내에서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아직 제약이 있기 때문"이라며 "세종학당을 찾는 이란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 가고 싶어하는 성향이 대단히 강하다"고 말했다.

김 디렉터는 "최근에는 한국에서 이란을 방문하는 기업 관계자도 많지만 역으로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이란 비즈니스맨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라며 "지난해에 비해 올해보다 3배가량 늘어 관련 일정을 주선하는 일로 바쁘다"고 말했다.

이란에 불고 있는 또 하나의 변화의 바람은 관광자원 개발이다. 페르시아 유적지와 성지에 관련된 종교 유적이 많은 이란은 터키 못지않은 관광자원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제재로 관련 인프라가 개발되지 않아 지금은 유럽에서 찾아오는 소수의 관광객만 있다.

타브리즈에 거점을 둔 아자르 게슛 말레키 여행사의 레자 말레키 관리이사(35)는 무엇보다도 한국 관광객 유치에 많은 공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4개월 전 한국을 방문해 서울과 제주도를 1주일간 다녀왔으며, 관광객 유치를 위한 비즈니스 업무를 보고 왔다"며 "이란에 돌아온 후 25명의 이란인을 서울과 제주도에 각각 사흘씩 보내 한국을 둘러보게 했다"고 말했다.

레자 말레키 이사는 "우리는 한국 관광객 유치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한국인을 위한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있으며, 한국인 가이드나 이를 위한 가이드도 육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터키, 독일, 이탈리아 관광객 일부가 이란을 찾고 있다.

테헤란 시내 한 상점의 TV에서 한국드라마 '동이'가 방송되고 있다.
테헤란 시내 한 상점의 TV에서 한국드라마 '동이'가 방송되고 있다.

지난 5월 23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북부에 위치한 국제전시장에서 열린 '한국상품박람회'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란 여대생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년째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네다(왼쪽 첫번째)는 한국과 이란의 가족문화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23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북부에 위치한 국제전시장에서 열린 '한국상품박람회'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란 여대생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년째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네다(왼쪽 첫번째)는 한국과 이란의 가족문화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투자를 원하는 이란…갈길은 멀다

미국의 대이란 2차 경제제재 조치 해제 이후 유럽과 아시아권의 기업들이 이란의 문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있다. 인구 8000만명, 한국의 8배에 달하는 국토를 가진 이란시장은 이제 세계에서 몇 안 남은 신시장이기 때문이다.

이란 정부도 외국기업 유치는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이란을 단순한 시장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모즈타바 무사비안 이란무역진흥공사 아시아.오세아니아 무역 총국장은 "이란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이나 유럽 등 여러 나라 기업 진출을 적극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한국과는 3개월 전에 경제협력 협약을 체결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으로 양국 관계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라는 단서조항을 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이란)에서 만드는 것을 원한다. 밖(해외)에서 만들어 이곳에 팔기만 원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이는 현재 이란 정부가 해외기업 유치를 적극 원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외국기업의 직접적인 투자다.

현재 이란에서 추진 중인 에너지나 인프라 건설프로젝트 등은 대부분 해외기업이 수주해서 직접 자금조달을 해야 하는 방식이다. 이란 정부와 국영기업의 재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승옥 KOTRA 테헤란무역관장은 "이란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파이낸싱이 가장 먼저 수반돼야 한다"며 "오랜 경제제재로 정부의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란에 진출하려는 업체들은 이런 위험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란 정부는 원유에 의존하는 다른 중동 국가들과 달리 산업화를 꿈꾸고 있다. 제조업과 첨단기술을 육성해 에너지와 함께 국가의 양대 기틀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이 때문에 외국기업들이 이란에 들어와 직접 공장을 세우고, 고용을 일으키고, 기술을 전수하기를 원하고 있다.

모즈비타 무사비안 총국장은 "한국은 조선산업, 자동차, 기계, 전자, 화장품, 식품 등 가장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많은 교역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경제탄압(이란측 표현) 동안에 우리는 무엇이 필요했는지 고민해 왔다. 공업, 현대화된 농업방식 등의 발전 등이 모두 이란 안에서 이뤄지길 바란다"고 못 박았다.


아직까지 이란 내의 부족한 인프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개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강조했다. 그는 "전기 공급은 이제 대부분 해결됐으며, 불투명한 세금 징수는 지난해에 비해 크게 개선했다"며 "밀수품들은 상공부가 나서서 집중 단속하고 있으며 차하바르 지역의 자유무역지대를 이용하면 세금을 감면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산 수입에 대해 30% 세금감면, 품목에 따라 50%까지 감면해주는 방안도 정부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ahnma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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