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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특권과 눈높이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14 17:24

수정 2016.07.14 17:24

[여의나루] 특권과 눈높이

조선시대 문종으로부터 정절공(貞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던 정갑손의 일화다. 그가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일이라고 한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던 중 생원 향시에 자신의 아들이 합격한 방(榜)을 보고 시관(試官)을 꾸짖으며 아들의 이름을 명단에서 빼고 시관도 파면시켰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의 학업이 아직 향시에 합격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고 시관의 아첨을 경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니라는 자세는 청백리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이 일화를 이 시대의 공인들이 갖추어야 할 청렴상으로 인용하곤 한다.
그처럼 굳이 청백리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공인으로서의 처세가 흔한 일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가 난데없는 조선시대 일화를 꺼낸 이유는 20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국회의원들이 보좌진 자리에 친자식, 일가 친척들을 채용해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마다의 그럴만한 사정이 있거나, 피붙이이기는 하지만 워낙 능력이 뛰어나 다른 이 몇보다 낫다는 낯간지러운 변명이 있기도 하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국회의원 친인척이라고 해서 원천적으로 국회공무원 입성을 막아서야 되겠느냐는 당당한(?) 주장도 있다. 어쩌면 별 틀린 얘기도 아닌 성싶지만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걸 보면 어찌 이번 일만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겠는가. 소위 행세깨나 한다는 높으신 분들의 자식이나 자기 주변사람들에 대한 인사청탁이 계속적으로 논란이 돼왔고, 더더욱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는 부패사례로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때마침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특권 내려놓기 논란과 아직 시행도 하지 않은 김영란법이 위헌성이 있느니, 내수경기를 침체시킬 우려가 있느니 하는 논란을 보는 국민들의 국회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지지 않으면 비정상일 것이다.

매번 국회 개원 초기엔 국회의원들의 특권 내려놓기에 의원 스스로 열을 올리곤 한다. 하지만 용두사미 격이 돼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필자는 국회의원들의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은 민주주의가 발전해오는 역사 속에서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만들어진 제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기에는 전제적인 왕으로부터의 국민들의 대표를 보호하고, 근대에 와서는 검찰권과 경찰권을 갖고 있는 행정부로부터 부당한 체포를 방지한다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그 필요성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 사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정치인에게 개인적이란 표현이 다소 어폐가 있지만) 비리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목적이 농후한 무책임한 발언들이 면책특권 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개선이 필요하다고 필자도 생각한다. '특권 내려놓기'라고 규정해 버린 것부터가 뭔가 출발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입법권이 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는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맞게 오.남용하지 못하도록 고쳐야 한다. 과연 온전하고도 완벽하게 바꿀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라고 비판받지 않아야 할 텐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사람들의 행동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실험한 결과가 있다. 두 눈의 형상을 가진 로봇을 정직상자(Honest Box) 앞에 두었을 때 스스로 치른 물건값이 아무것도 없이 정직상자만 두었을 때보다 더 많이 걷힌다는 것이다.
심지어 로봇이 아닌 그림으로 사람의 두 눈을 그려놓기만 해도 그렇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국회의 특권 내려놓기 논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내려놓을지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두 눈, 바로 국민 눈높이에 얼마만큼 맞추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절공이 일찍이 보여준 깨끗한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동 전 예탁결제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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